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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벗,지인과 함께)

허원술 군의 전화 한 통

 

캐롤이 행인의 발걸음을 흥겹게 하거나

네온싸인 현란한 도심의 흥청거림도 없는

산촌의 적막한 오두막

 

제야의 종이 울리기 몇 시간 전이다.

휴대폰에 자꾸만 눈이 가는 걸 보면

왠지 허무하고 쓸쓸해지는 마음을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는

뎅그렁 뎅그렁 풍경(風磬)이 허전함을 달랜다. 

 

이래서 때로는 밝고 빛나고 들뜨면서 왁자지끌하며

흥청거릴 필요도 있겠구나 싶다.

많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거나 친구들, 이웃들과 함께 누리는...... 

 

이 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경주에 사는 허원술 군의 정겨움이 뚝뚝 묻어나는 안부 전화가 왔다.

30년이 지난 후에도 나를 스승으로 대접해 주는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제자다. 

 

선생님 별고 없으시지요?”

원술이구나. 아이구. 반갑고 고맙구나. 원융이도 잘 지내냐?” 

 

부끄럽지만 교편 생활 30년만으로 직업 생활을 끝낸 나에게 내세울만한 제자가 별로 없다.

하기사 요새 세상에 무슨 스승론이람.’이라는 체념론과

전통적인 교사관을 가지고 있는 나는 퇴물인거야.’라는 자학적 비관론 사이를 오간다.

어떤 이들은 출세한 제자들의 목록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분도 많지만

나는 오랜 세월을 건너 인간적인 존경과 신뢰로 나를 스승으로 만들어준

이런 제자가 더욱 자랑스럽다.

제주도에 귀양을 간  추사 선생을 위해  험한 바닷길을 건너 스승을 찾아간

애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이 세한도의 그림 안에 숨어 있는 끈끈한 사제간의 정을 떠올린다.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사범대 출신이라는 것을 평생 긍지로 삼았던 지난 시절이었다.

참되고 진실한 인간으로,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가라고 침을 튀기던 지난 시절이었다.

공부를 잘하고 착해서 모범이 되는 학생들은 내 관심 밖이었다.

유능하고 인기 있는 탈렌트 같은 선생이 아니라 엄격한 아버지 같은 선생이 되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스승의 날 같은 기념일에도 나를 찾아오는 제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내게 30년이라는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 찾아온 형제 제자들이니 내 반가움이 오죽하리오.

한국화를 그리던 아버지의 달마 그림 한 점을 선물하던.......

부모님 모두 세상을 뜨셨지만 옛 집에서 두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터라

하늘이 내린 우애로구나라며,

내가 너희 형제에게서 배운다라며 등을 토닥여 준다. 

 

이제 곧 제야의 종이 울릴 것이다.

잠깐 사이에 고적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훈훈해지며 행복해진다.

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