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담화

로빈슨과 방드르디(2) - 개미와 베짱이

청곡2 2016. 7. 5. 07:00

개미의 베짱이의 동화는 국가 사회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재로 매우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전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베짱이가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개미를 산업의 역군에 비유한다면

베짱이는 연예인이나 문화 예술인이다.

어떤 사회나 국가도 이런 역할들이 상호 보완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것이다.

베짱이의 노래는 근면한 노동 이상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노동에 혹사 당하는 개미들에게 휴식과 정신적 위안과 보상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집 가족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영화 구경도 외식도 사절하고 오로지 본벌이에 집중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그런 금지와 속박의 규율이 해제된다.

어려웠던 시절을 보상 받기 위해 여행을 하고 음악회에 가게 된다.

 

우리는 너무 목적 지향적이 아닌지 성찰해 볼 일이다.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주의와 내세의 구원을 간절히 염원하는 기독교는 

목적 지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요구한다.

미래는 모두 좋은 것인가? 미래의 장밋빛 청사진을 모두 믿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현세의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검열해야만 하는 것인가?

 

 

 

 

때로는 방드르디처럼 살면 안 되는 것일까?

때론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지만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드르디에게서   배울 점은 없을까?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없지만

오로지 현재의 욕구 충족의 즐거움을 누리며

해맑은 웃음에 꾸밈없는 진실함을 가진다면

때론 그런 삶도 괜찮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던지는 미끼는 매우 유혹적이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표류한지 28년만에 문명의 배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의 끝없는 욕망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과거의 아비투스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로빈슨은 목적을 위한 노예가 되지 않기로 한다.

스페란차 섬의 비문명에서 누리는 놀이의 아비투스를 터득한 것이다.

욕망충족을 향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삶의 허무주의보다는

현재 이 순간의 즐거움을 택한 것이다.

 

나는 베짱이의 느긋한 휴식, 여유로운 놀이를 이미 즐기고 있다.

비록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도 온갖 물건이 유혹하는 마켓도 없지만

내가 머무는 이 섬에서 나는 베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