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즐기는 삶
예전에 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냇가에서 천렵을 즐기던 모임이 있었다.
대엿 명이 영덕 오십천이며 영양의 반변천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는 모임이었다.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주로 반두와 지렛대로 돌을 움직여 고기를 민물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는데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냇가에서 조리해서 먹기도 했었다.
이 모임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까닭은 놀이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멀리 냇가에 가지 않아도 좋은 횟집도 수두룩한데 왜 고생을 자청하는 것일까?
놀이의 아비투스 때문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물고기를 잡으며 즐거워했던 아비투스를 현재화하는 즐거움이 어지간히도 컸던 것이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강변에 솥을 걸고 장만하는 일이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여럿이 함께 하는 공동 체험과 놀이의 즐거움이 더 컸던 것이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의 주인공인 로빈손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구출되자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투르니에가 쓴 소설 속의 로빈손은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무인도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방드르디라는 원주민 소년에게서 배운 것이다.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 젖어 있던 로빈슨이 전혀 자본주의를 모르는 원주민에게서 배우고 터득한 사람의 지혜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언젠가 다가올 심판의 시간, 천국에 드는 날을 위해
현재는 고통이며 미래를 위한 희생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는 오로지 현재의 삶을 중시한다.
미래를 위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삶에서 쾌락을 누리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보다는 게으름을 피우며 놀기를 좋아하는 베짱이처럼......
문명의 굴레에 덧씌워진 생각으로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려서 온갖 놀이에 열중하며 즐기던 때에 무슨 스트레스가 있고 경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운동 선수들은 과도한 승부욕으로 경기력을 잃지 않기 위해
<경기를 즐겨라>고 하는 까닭도 이런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노동을 놀이로 승화 시키려고 했다.
삶의 초월적인 목적이 아니라 삶 안에 내재된 즐거움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할 때 노동요를 부르거나 많은 세시풍속들을 놀이처럼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