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은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
얼시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오월 화창한 봄날에 흥겨운 노랫가락이 바람결을 타고 산하에 울려나왔다.
때는 아득한 옛날 60-70년대,
마을 사람들이 야외에 나가서 먹거리를 직접 장만해서 먹고 마시고 놀았었다.
풍광이 좋은 곳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계원들끼리 푸지게 차려놓고 흥겹게 놀았다.
새마을 운동이 시골 풍경을 바꿀 즈음, 조금 형편이 나아진 계원들은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이 노래를 불렀다.
흔들리는 버스 그 비좁은 통로에서 몸을 흔들며 미친 듯이 노랫가락에 몸을 맡겼다.
고달프고 지친 삶의 한을 털어놓는 한풀이처럼 보여졌었다.
목에 핏대를 올려 노래 부르고 술에 비틀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런 놀이가 고달픈 삶의 고통을 마취 시키고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대체 저런 흥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전답이래 봤자 겨우 식량도 채 안되어,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던 이들이
저렇게 뜨거운 불덩이 같은 열정을 어디에 품고 있었던 것인지.......
삶의 애환도 이 순간만은 환희로 끓어오르고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늙어지면 못노나니 젊어서 놀아라는 구절에서 니체의 실천적인 삶의 명령이 떠오른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는 영원회귀 사상이 풍겨나온다.
앞으로 올 미래의 삶이 아닌 현재의 삶을 긍정하라는 실천적 삶의 명령인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의 삶, 바로 여기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고 믿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흥겹게 마시고 먹고 노는 현재, 여기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란 것이다.
지금의 삶은 순간적인 삶일 뿐이고 미래나 사후에 영원한 복락이 주어질 것이라는
자본주의적 삶이나 기독교적 가르침을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다.
현재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기 보다는 현재의 삶을 즐기라는 것이다.
이는 소유지향적이 삶이 아니라 존재지향적인 삶이기도 하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 시절은 가고 그 사람들은 떠났지만 이 흥겨운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술은 마시지 않아도 취하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어깨춤을 추며 흥에 내 몸을 맡겨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