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 토기를 감상하며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명언이다.
경주국립박물관을 수학여행 인솔 차 방문할 때면 입구에서 출구까지 달리기를 하듯이
주마간산격으로 지나치는 아이들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좀 더 배웠다는 나도 종종걸음으로 스쳐간 문화유물들이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토기 전시관에서는 발걸음이 빨라졌으니 모두가 무지와 무관심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토기를 빗살무늬 토기라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 시대로 거슬러 오르기 위해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적 상황의 논리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적어도 일 만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원시적 상태에 머물러 냉철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종이컵이니 나무그릇이니 놋그릇이니 플라스틱 그릇 따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생흙에 물로 반죽을 해서 높은 온도의 불에 구우면 단단해지고 물에 풀어지지 않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은 당시의 시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발견이 아닌가!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우연한 기회에 사소한 일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불을 지핀 자리에 놓여진 흙무더기가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의도적으로 불에 구웠을 것이다.
붉은 황토색을 가진 이 토기는 가마에서 구운 것이 아니라 노지의 자연 상태에서 500도 정도의 불로 가열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물로 반죽된 질흙이 불을 만나서 전혀 다른 성분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으니 기적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 기적이 구체적인 생활 용기가 되어 생활이 윤택해지고 편리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이 토기는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면 중요한 재산 목록에 포함될 만도 하다.
수렵과 채집을 위해 떠돌아 다녔던 방랑 생활이 끝나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을 하게 되는데
토기는 운반과 저장을 위한 중대한 용기가 된다.
특히 생활에 필수적인 물을 떠오거나 저장하는데 이런 그릇의 용도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마치 커다란 팽이처럼 만든 토기를 땅을 파서 세운 다음에 불을 지펴서 조리를 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니
생활이 안정되고 그만큼 풍성해졌을 것이다
어떻게 성형을 했을까?
마치 떡가래처럼 둥글고 길게 흙의 띠를 만들어서 빙빙 돌려가며 위로 쌓아올린 후에 덧흙을 발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왜 빗살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일까?
불로 가열했을 때 균열에 대비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릇에 무언가 표현을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무 조각이나 동물의 뼈 등을 이용해서 찍거나 도려내서 무늬를 만드니 작은 성취감 같은 것을 누렸지 않았을까?
내 손길로 만든 것이라는 뿌듯한 긍지도 있었을 것이다.
토기 중에서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만큼 제작 기술이 단순하고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얕보아서는 안될 일이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시각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인식의 기본은 상대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시의 관점 당신의 사람들의 여건과 노력과 지혜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잿물을 발라서 가마에 넣어서 높은 온도로 구워내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아직 까마득하다.
이제는 토기 박물관에 가면 제법 한참 머물러 있을 것 같아 대견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