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의 글방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청곡2 2018. 2. 9. 07:00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요셉 보이스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선보인 행위예술의  작품이다.

기이한 몰골과 분장으로 관람객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준 작품이다.

발에는 철판을 끈으로 동여매고 머리에는 금박과 꿀을 뒤집어쓴 채 죽은 토끼 한 마리를 안고

의자에 앉아서 토끼에게 전시된 작품을 3시간동안 설명해 준다.

관객들은 그의 괴상한 행동을 공연장 밖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보이스에게 작품을 설명해 달라고 하면 듣는 둥 마는 둥 할 것이 분명하다.

자꾸 보채면 따귀를 한 방 맞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만 한 것이 유사한 상황에서 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론적으로 꼬집어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 작품이 갖는 논리만을 이해하세요.“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늑대와 우리에서 일주일간 공연하는 모습>


그 참 멋진 말이다. 한 시대의 예술의 천재적인 전위대답다.

사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언어로 표현하는 즉시 오히려 작가의 목적이나 의도는 제한될 수도 있다.

죽은 토끼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펠트 천, , 부상으로 분장한 것은 자신의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체험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죽은 토끼의 영혼을 불러 대화하는 무당이 되려는 것일까?

아마도 보이스는 이성이나 개념 등과 같은 합리를 배격하는 듯하다.

사실 우리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선호하고 진리라고 여기면서

이해되지 않거나 증명되지 않는 영적인 것들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풍토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전시장의 펠트천>


이런 나만의 장황한 수다를 늘어놓는데 약간의 근거가 있다.

보이스는 우리의 우상이었던 천재 백남준과 매우 예술적으로 합동공연도 할 만큼 친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위 예술가들은 플럭서스라는 그룹을 통해 행위예술 공연을 했는데,

피아노를 때려 부순가든가, 소리를 장시간 지른다든가, 관중석으로 가서 옷을 찢기도 하는 괴이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공연장은 사전에 각본에 따라 철저히 계획되고 관객들은 품위를 갖추고 관람하는

그런 관습이나 기존 질서를 거부하며 거기서 벗어나라고 그런 상징적 행동을 우발적으로 하는 것일까?   



나는 보이스의 전시나 공연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무한한 호기심과 존경심을 가진다.

그 이유를 들라면 그가 자연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을 첫 번째로 들고 싶다.

토끼는 동물이고 그것은 바로 자연의 상징이다.

우리가 자연의 질서나 아름다움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본으로 이득을 보려고

인간성을 상실하며 극단적으로 변해가는실상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두번 째는 세상의 상반되고 양극화된 사상과 체제들을 포용하고 화합하라는 점을 배운다.

그의 작품에서 유난히 많이 나타나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펠트천은 그런 갈등과 분열을 덮으라는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를 더 든다면 우리 모두가 예술가가 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그가 격려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두 부류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생활의 장()이 바로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비록 뛰어난 행위예술가는 아닐지라도 작은 행위마저도 의미있고 아름답게 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