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에서 - 공공의 장과 소음
커피숍 안이 왁자지끌하다
도시에 나오면 눈과 귀가 더욱 분주해지는데 스트레스를 많이받는 쪽은 귀다
불쾌한 자극에 대해 시선을 피하기는 쉬우나 귀를 막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음은 때로는 폭력성을 띄기도 한다.
산골에서 유거한다고 여기는 나는 더욱 소음에 민감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도시란 거대한 기계의 여러 부속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다이나믹한 활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뎌야하는 불쾌한 소음으로 여긴다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커피숍으로 입장하자 수다가 자욱하게 퍼지고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추임새가 된다.
낙엽이 뒹굴어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더니....
젊음은 웃음인지 연신 터져나오는 다발성 웃음소리가 한정된 공간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절제되지 않는 웃음 소리가 차츰 소음이 되고 불쾌감이 증폭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수준을 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나는 공공의 장에서 웃음소리는 절제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사회의 기본 도덕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누구나 존엄한 존재로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권리 의식의 바탕에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 삶의 문맥에서 형성된 성심이 통째로 거부 당하고 있다
행간에 집중하던 시선이 자꾸만 분산되어 책을 덮는다
커피숍에서 쾌적한 시간을 보냐려는 나의 욕구와
자유분방하게 대화하려는 일군의 아가씨들의 욕구가 상충되고 충돌한다.
그러나 나는 소음의 제공자들에게 정당한 나의 권리를 주장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쌍방의 소음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민사회의 도덕 또는 예라는 기준을 판단의 준거로 내세운다면
그 쪽은 법적인 기준이 있느냐며 항변하며 고리타분한 시골의 샌님 같다며 조롱할지도 모른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공자의 말씀을 훈계조로 내세우며 나무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공자의 말씀이 현대사회에서 통용될런지는 의문이다.
내면화된 예로서 자기 수양과 사회 질서의 원리로 삼으려 했던 공자의 말씀에도
신랄한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면화된 예는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일 수도 있다.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으로서의 예는
지키면 좋고 안지켜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
법적인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못을 보고 내면에서 스스로 재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아쉬워했던 공자의 말씀이 있다.
공자님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른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판해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허물과 잘못을 저지르는 피고, 죄인이 된다.
또한 내가 스스로의 허물과 잘못을 살피고 적발하는 원고, 검사가 된다.
또한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죄의 유무를 따지는 법조문,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나는 동시에 여러 역할을 수행할 때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진다.
자아의 분열로 초래되는 심리상태다
나는 공중 시설에서 조용해야 한다는 판에 박힌듯한 의무 의식이 초자아가 되어
나를 검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큰 소리로 전화를 받거나 소리내어 하품을 하는 행동들은 몰상식하고 품위없는 행동으로
여기고 삼가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깊이 따지고 보면 그건 내가 내게 가한 폭력일 수도 있다는 철학자들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세운 행동의 규준이 타인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냉철한 고려가 없이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욱 큰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음이 불편하지만 내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타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얼마나 즐거웠으면 저럴까, 나도 친구들 만나면 저럴텐데......
기지개를 켜고 아메리카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덮었던 책을 다시 펴서 읽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