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담화

오이와 숭늉

청곡2 2023. 6. 29. 22:00

기도 중인 아내에게 '오늘 점심 때 말이오'
말 머리를 꺼내자 무슨 중대한 의논이나 하는 줄 알고 고개를 돌리길래 '점심 때 오이를 어슥어슥 썰어주면 좋겠소'
했터니 어이가 없다는듯이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오?'란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중요한 일처럼 말한 것이라는데.......

텃밭에서 금방 따온 오이를 썰어서 쌈장에 찍어 먹는데 어떤 날은 어슥어슥 썰어내고 어떤 날은 가지런히 썰어내길래 내 선호를 말한 것인데 사실 사소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다
한심한 사람이라고 해도 굳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실은 오이를 따면서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오이를 어슥어슥 썬 모양이 가지런하거나 균일하지 않아  비대칭, 비균제라는 개념과 더 나아가 일전에 접했던 고유섭 선생의 미학과도 연결되었다

선생은 구수한 큰 맛이라는 짧은 귀절로 한국의 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던 분이다  가장 구수한 맛으로는 숭늉이 으뜸이다
숭늉은 쇠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푹 삶아 후식으로 내놓는 반은 음식이고 반은 차다
숭늉의 맛을 성분 분석하여 구수함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구수한 큰 맛은 미각에 한정하는 맛이 아니다 특정한 재료와 조리법을 넘어서는 분위기와 느낌을 내포하는 복합적인 맛이다

숭늉은 밥의 부산물이다 본래 숭늉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밥을 짓다보니 숭늉이 생기는 것이다 격식을 갖춘 밥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도 매우 높은 영양가와 맛을 지닌다 자칫하면
설겆이 과정에서 버려질 수도 있지만 그 맛을 놓치지 않았다

구수한 큰 맛은 여러 개별적 요소나 구체적 경험들을 포괄하는 여유로움에서 나온다
오이를 어슥어슥 썰거나 수제비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떠넣는 방식은 계량화나 계수화하지 않는다
디테일한 방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 맛은 라면을 끓이는 방법처럼 획일화되지 않는다
재료의 다양한 차이를 모두 수용하고 방법상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정제되고 균일화된 것에는 새로운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것은 통일성을 저해하는 열등하고 소홀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러 다양한 차이를 포용하게 되면 하나의 표준이 되는 맛과는 다른 다양한 차이를 가진 여러 맛을 긍정하게 된다
여기서 비균제적, 비대칭적, 비표준적인 것은 강한 운동성을 가지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오이 한 조각에서 출발한 두서없는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