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마다 능소화가 사색의 대상이 되는데 올해는 능소화를 보며 베르그송의 철학을 연상한다.
사진으로 본 능소화는 촬영한 시점에서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모습(靜態的)이다.
우리는 능소화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나 지식을 알려고 한다.
키는, 잎은, 색깔은, 원산지는, 자라는 성질은, 약성 등은 어떻고 어떠하다는
잡다한 지식은 능소화 주변을 맴도는 분석적 방법이다.
우리는 능소화 주변에서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그
것으로도 모자라 인터넷으로 탐색하며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
이러한 관찰의 방법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틀림없으나 한계가 있다.
즉 관찰자의 관점에 의해 대상의 일부만을 파악할 뿐 전체를 통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연결되어 있다.
즉 현상 세계 밖에 존재하는 능소화의 이데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인이자 본질이 되게 하는 완벽하고 고정된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낡거나 소멸하지 않고 존재가 지향하는 긍극적 이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이성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지속적 흐름과는 무관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내가 지금 바라보는 능소화 한 그루는 능소화의 이데아의 환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베르그송은 과학적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식의 한 방법으로 과학적 분석의 일을 하는 지성 대신에
대상을 통찰하는 직관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대상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베르그송은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아 안으로 들어가 자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직관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시간의 지속적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지성은 비운동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직관은 지속적인 운동의 과정에서 시작한다.
사물 내부의 지속이라고 불리는 과정에 모든 관심을 쏟는 것이다.
그는 전통 철학이 정태성을 극복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사물의 생성과 운동과 지속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시간의 문제, 시간 개념에 대한 분석이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이다.
창밖에 능소화 한 그루를 며칠 전부터 주시하고 있다.
작년에도 바라보던 나뭉데 잎이 돋고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
바람이 불어 꽃송이들이 이리저리 한가롭게 움직이고
벌들이 보물 창고를 연신 들락거리며 꿀을 딴다.
방금 미풍 한 점에 꽃송이 하나 툭 떨어진다.
며칠 새에 땅에 떨어진 수북한 잔해 위에 무심하게 드러 눕는다.
이미 떨어져 일그러진 형체와 퇴색해가는 주황색 꽃송이와
아직은 싱싱함과 향기를 잃지 않고 있는 살아있는 꽃송이들과
가지마다 봉긋봉긋한 움 속에서 피어날 꽃망울들이
끝없이 흐르는 배 안에서 출렁이고 있다.
한 번도 끊인 적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내일은 또 다른 꿈을 꾸리라 다짐하며
지하의 물길을 찾아 깊이 뿌리 내리고
이 왕성한 볕을 쓸어 담아 초록잎 더욱 무성해지겠지.
지난 겨울 가지 끝에 매단 움막 안에서 얼은 눈망울로 꾸던 꿈이
한 여름날 무수한 꽃으로 피어나 생을 구가(謳歌)하는구나.
춤추고 노래하라
온 사방에 선포하는 나팔 소리여.
한 번도 흉내 내지 않은 새 몸짓으로
아무도 부른 적 없는 새 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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