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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이 채반에서 마르고 단호박을 거두어 썰어서 말린다 동글동글하여 큰 것은 배구공만 하고 작은 것은 핸드볼공만한 단호박인데 포항에서 종자를 얻어 심고 가꾼지 서너 해째 된다 잘 익은 씨를 이웃들에게 권하니 모두들 엄지척을 한다단호박을 말리는 것은 저장을 해서 연중 식용으로 할 요량이다잘 말려서 방앗간에서 빻으면 언제든 꺼내먹을 수 있는 식재료다 가까운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잔 손질이 많이 가야한다 씻고, 속을 빼내고, 썰고 말리는 일들이다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곧 싫증이 난다 그러면 일이 사소하게 여겨지고 지겨워진다 이런 일을 귀찮게 여기면 못할 노릇이다그런 이들은 마트에 가서 사먹으면 된다꼬득꼬득 말라가는 호박 살을 만져보면 따스한 햇볕이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차츰 기울어가는 .. 더보기
그림 한 점을 감상하며 가을의 서정이라면 흔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향락하는 축제장의 국화가 만개한 동산을 연상할 것이다풍성하고 화려하며 결실을 맺는 풍요롭고 찬란한 풍경이 익숙하다창현 화백의 만추의 서정을 물씬 풍기는 그림을 감상한다풀잎이 마르며 야위어지고 부서지는 모습이 애상에 젖게한다이 계절에는 기름져 살찌고 팽만한 것들이 메말라 부서지고 주름지며 균열이 생긴다볕은 차가워지고 왕성한 기운으로 부지런히 볕을 긁어모으던 잎들이 떨어지고 휴면에 든다풀벌레가 그런 잎사귀에서 애상곡을 부르고 있다이제는 내면을 돌아보며 거친 숨을 진정하며 차분해질 때라고 한다창현 선생님은 이 만추의 풍경에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그림처럼 적어놓고 있다 우리의 민족적인 서정이 담겨 시에 담긴 의미를 사유해 본다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 더보기
글을 새기며 의자에 앉아서 나무 판자에 쓴 기표의 획을 따라 맹렬한 눈빛으로 망치질을 하던 사람이 물러나와 그 자리를 바라보니 의자가 비어있다커피를 타놓은 것도 잊은만큼 마음이 한 곳에 집중했던 것이다오랜 벗에게 줄 선물을 직접 만들고 있다친구의 부친은 초등학교 은사님이기도 하고 넓은 한옥에서 유학의 가풍이 당당한 양반 가문이었다가문의 골동품을 모조리 내게 선물한 친구라 답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하다어떤 글을 새겨주어야 좋을지를 결정하는 일이 제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친구의 자택 벽에 오래 걸려 있을만한 글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은 까닭이다마침내 결정을 한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행복에 관한 명언인데 류시화 시인의 시집에서 인용하여 널리 알려진 글이다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사랑하라,.. 더보기
상어의 신화 상어 한 마리가 인공 수로에 들어온 사건으로 이름이 지어지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유명세를 타고 신화가 생겨난다아쿠아리움에서 유영하는 어류들과는 달리 자의적으로 인간계에 진입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다바닷물이 들어오는 문명의 수로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만큼이나 복잡한 미로다막다른 길목을 친선과 화합의 공연장으로 이용하려는 것인지 혹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도움을 청하려는 것인지, 혹은 단순한 우연인지 실제는 알지 못한다사람들은 이 사건을 신기해 하며 나름대로 해석한다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간 세계에 파견된 자라는 토끼의 간을 구하려고 왔는데 이 부캉이는 어떤 목적으로 온 것일까?사람들과의 친선과 우의를 위해 용왕의 평화의 사절단임이 틀림없다귀환하여 용왕께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궁금하다 더보기
오동나무를 켜며 금년 봄에 얻은 오동나무 원목을 당산 개명제재소에서 켜 온다6개월동안 제재소에서 건조하고 5cm 두께로 켠다 원목을 선물한 후배에게 두 장을 드리고 운송을 도와준 집안 아우에게 두 장을 드리고 남은 여섯 장을 쌓아둔다잘 마르는동안 활용할 용도를 생각해 보며 요긴하게 사용할 것이다제재비(10만원)에다 보관해 준 사례금을 드린다 더보기
외종 아우 가족들과 진주에 거주하는 외종 아우 가족이 병원 문병차 왔다가 함께 점심을 먹는다 아우의 친형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문병을 하며 친척 간의 도타운 정을 나눈다옛날 외갓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식당인데 손님이 많다 외종질인 민석 군은 한 달 후에 제대를 하는데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내년 2월에 성균관대 의과대학 3학년으로 복학할 것이란다최전방 부대에서 대형 버스 운전을 했는데 입대 중에 면허를 득했다고 한다 더보기
토종 벌통 인적이 뜸한 병곡리 점터찻집 주인이 집 근처에 사육하는 토종벌의 많은 벌통들이 서정적으로 보인다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돌벼랑에 지붕을 모자처럼 덮은 벌들의 공동 주택이다인적은 뜸하지만 무수한 벌들이 함께 살아가니 한적하고 외로운 곳만이 아니다사람과 벌의 공생의 터전이다 벌들이 기거할 조건을 제공해 주고 댓가를 취한다이 거래는 자연이 허락하고 보증한 공정한 거래이며 종을 초월한 상부상조의 체계다사람은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고 벌들은 천혜의 꽃가루들을 모아 보물 창고를 채워준다 더보기
석축 틈바구니의 용담 석축 틈에서 자라는 용담이 이맘 때만 되면 제 존재를 드러낸다길다란 줄기를 따라 피어나는 청보라 꽃에 형광 물질이 섞여 더욱 밝게 보인다꽃은 가장 효과적이고 강렬한 현시의 수단이다 생애를 통해 가장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형태와 색깔과 향기로 존재를 드러낸다용담은 소수 부족이다 이곳에 이주한지 열 몇 해가 지나도 좀체로 확산될 기미가 없다번식을 잘하는 무리들이라면 일대에 제법 넓은 촌락을 이룰텐데......고귀한 종은 널리 확산하는 유전자의 전략을 취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