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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정용 의사의 장인 장필무 장군(1)

장필무(張弼武) -(1)

 

장필무<張弼武(중종 5(1510)선조 7(1574)>의 자는 무부(武夫), 호는 백야(柏冶), 시호는 양정공(襄貞公), 본관은 전남 구례(求禮)이며 무과출신으로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지낸 장사종(張嗣宗)의 손자로 태어났다. 장사종은 용맹한 무인이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조금도 민폐를 끼친 일이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무인(武人)의 길

 

장필무는 이러한 조부를 닮아서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평소에 과묵하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의 언동은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심()씨는 자녀를 교육하는데 매우 엄격하였다.

 

장필무가 어릴 때 잘못을 저지르자 그의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었다. 그 때 장필무는 울면서 소자의 죄는 마땅히 매를 맞을 만 합니다. 그러나 이 어깨에는 매질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장차 이 어깨로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큰 뜻을 품고 스승을 따라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서 사람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공명을 세워 조상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무인(武人)으로 입신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스스로 깨닫고 무예를 닦는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중종 38(1543)에 무과에 급제한 다음 감찰, 명천 현감(明川 縣監), 온성 판감(穩城 判官), 양산 군수(梁山 郡守), 장흥 부사(長興 府使), 강계 부사(江界 府使), 경상우도병사(慶尙右道兵使), 함경도 병사(咸鏡道 兵使),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 등을 역임했다.

 

 

 

 

뇌물 바친 자에게 오히려 뇌물을 먹여

 

장필무는 무과에 급제한 다음 해에 아버님의 상을 당하여 복상하고 명종 3(1548)에 명나라에 가는 사행의 종사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함경도의 명천 현감(明川 縣監)으로 부임했다. 그는 고을 수령으로서 백성을 자식 같이 아끼고 사랑함과 동시에 민폐를 일소하고 산업을 진흥시킴으로써 피폐했던 그 고을의 재정이 충실해졌다.

 

그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그에게 바쳤다. 평소에 부정과 특히 뇌물을 금지하였던 그는 이를 크게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앞에 앉힌 다음에 가져온 뇌물을 그 자리에서 모두 먹게 하면서 엄중히 훈계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그 고을의 관기는 더욱 쇄신되었다.

 

 

3년 동안 명천현감으로 치적을 올린 장필무는 함경도 북단에 있는 온성판관(穩城判官(판관은 의 소재지에서 수령의 속관으로 민정의 보좌역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부임했다. 명종 10(1555) 1, 장필무는 국경지대에서 치안을 교란하던 야인 수백명을 우리 측 성안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그리고는 본진에 있는 병졸 8명만을 거느리고 나아가서는 이를 크게 무찔렀다. 이를 본 오성부사 신경여(辛敬輿)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러나 장필무는 이는 오로지 부사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일이므로 모든 공로는 부사에게 있다고 사양했다. 부사는 이러한 장필무의 태도를 기화로 이를 모두 자신의 공로로 날조(捏造)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곧 탄로나 부사는 허위보고로 문책을 당하고, 장필무는 어사 조광언(趙光彦)의 보고에 따라 명종으로부터 표리(表裡; 옷의 겉감과 안집)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야인의 추장도 장필무에게 심복한다는 뜻으로 화살과 초피 등을 바쳤는데 그는 이를 모두 부사에게 보냈다.

 

 

 

 

정용 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50대 중반의 고령으로 의병으로 활약하다

두 조카와 함께 진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여러 번의 전공을 인정받아 문경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었다.

의사공의 아들은 순절한 아버지의 공로로 부역을 면제 받았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개인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당시의 사회적 풍토에서

이런 지나칠 만큼의 순수한 애국심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의사공의 장인인 장필무 장군의 청백리 기록을 살펴보면

과연 그 장인의 사위라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백야 장필무 장군은 조선 중기의 가장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두 아들과 함께 충신으로서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분이다.

 

관련 기록을 옮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