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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정용 의사의 장인 장필무 장군(2)

 

장필무(張弼武) -(2)

  

초가삼간(草家三間)이 유일한 재산

 

온성판관으로 있던 장필무는 천재에 따른 피해대책에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충북 영동(永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산이 있는 곳에 3칸짜리 초가를 짓고 세월을 보냈다.

 

명종 12(1557)에 민응서(閔應瑞)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면서 장필무는 편비(楄碑; 군영의 부장)로 기용되었다. 그 무렵 왜구 10여척이 제주수역을 침범한 일이 있었다. 목사 민응서는 이를 나포하고자 하였으나 왜구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목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장필무에게 계책을 물었다. 장필무는 왜구가 이미 멀리 도주하였고 풍랑이 강하므로 추격하면 불리합니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공명심에 사로잡힌 목사는 듣지 않고 추격하다가 물속에 잠복하였던 왜병의 기습으로 우리측 군사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

 

목사는 장필무의 건의를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왜구의 선박 1척을 나포한데 대해 장필무에게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이를 굳게 사양하고 신병을 핑계 삼아 고향에 돌아왔다. 그의 양심상 도저히 포상을 받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목사와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제주목사는 조정으로부터 포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많은 군졸을 잃은 죄로 문책을 당하였다.

 

 

 

명종 14, 장필무는 양산군수(梁山 郡守)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양산은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과 좌수영(左水營) 관내에 위치함으로써 평소에 군용품의 징발이 많아 민폐가 심한 고을이었다. 장필무는 부임하자 이러한 민정을 파악하고 법률에 정한 징발외에는 일체 이를 거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관아로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양산군수는 군령을 거부하고 실행하지 않으니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러는가하고 따졌다. 장필무는 나는 아무것도 믿고 기대는 것이 없소. 다만 나에게는

3칸짜리 초가가 있을 뿐이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얼굴빛을 잃고 서로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그 뒤 장필무는 임기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조그마한 토담집을 짓고 상수리 껍질로 지붕을 덮고 살았는데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장필무는 명종 18(1563)에 장흥 부사(長興 府使), 그리고 다음 해에 부산첨절제사(釜山僉節制使), 제주 목사 등을 거쳐 9월에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첨절제사는 절도사 아래 각 진영의 책임 무관직임, 특히 만포진첨절제사는 정3품 당상관임)로 부임했다.

   

이 무렵 명나라에 반역한 일당의 무리들이 국경근처에 준동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황제는 우리 조정에 이들을 토벌하도록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장필무가 적임자라 하여 그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했다. 장필무는 정병 100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거지 깊숙이 매복하였다가 그들을 일망타진, 수백명을 생포하여 명나라에 인도, 황제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선조 2(1569), 장필무는 가선대부(嘉善大夫, 2품의 품계)로 특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선조는 그를 불러 경이 청렴 근면한 것은 가상하나 인명을 아끼지 않는 것은 장수로서 큰 흠이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마땅히 삼가도록 하오라고 하교했다. 이에 크게 감격한 장필무는 임지에 부임하자 선조의 하교를 글로 써서 벽에 걸어두고 조석(朝夕)으로 쳐다보면서 계명으로 삼았다.

  

장필무는 선조 5년에 함경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또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방에 야인들의 소요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부임하였다. 장필무가 다시 북방에 부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야인들은 장장군이 부임하였으니 국경을 침범하지 말자고 서로 경계함으로써 국경지방은 스스로 평정되었다. 명천현감으로 있으면서 화살 한 발로 호랑이를 잡은 장필무의 용맹은 일찍부터 야인들에게는 신화처럼 전하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 해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옮겼으나 신병으로 다시 사임, 고향에 돌아왔다가 선조 7(1574)에 작고하니 그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다.

 

 

 

 

정용 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50대 중반의 고령으로 의병으로 활약하다

두 조카와 함께 진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여러 번의 전공을 인정받아 문경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었다.

의사공이 아들은 순절한 아버지의 공로로 부역을 면제 받았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개인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당시의 사회적 풍토에서

이런 지나칠 만큼의 순수한 애국심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의사공의 장인인 장필무 장군의 청백리 기록을 살펴보면

과연 그 장인의 그 사위라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백야 장필무 장군은 조선 중기의 가장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두 아들과 함께 충신으로서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분이다.

 

관련 기록을 옮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