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쌓인 낙엽을 줍기 위해 뜰로 나선다.
조경석 바위 틈새에 무성하게 몸집을 불린 섬백리향 덤불은 마치 큰 지하철역처럼
낙엽들이 옹기동기 모여 안식처가 되어있다.
거리를 방황하다 바람없는 지하철역의 한 코너에 자리잡은 오갈데 없는 노숙자처럼,
낙엽이 섬백리향 덤불속에서 연산홍 가지 아래에서 지난 겨울을 견디고 있었구나.
바람이 더 이상 몰고 다니지 않도록 코너에 몸을 눕힌 채 달관의 경지에 들었구나.
지치고 창백한 삭신을 눕히고 바스락거리더니 어제 봄비에 젖어 있다.
거리의 청소부처럼 집게 같은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다.
낙엽더미 속에서 고개를 쳐들고 솟구치는 생명의 양기들을 보며 반가움에 탄성을 지른다.
그 좁은 틈새에서도 풀들은 왕궁처럼 회려하고 요새처럼 굳건하다.
왕궁처럼 찬란한 금낭화가 반 뼘 너머 자라고 있다.
사초며 원추리며 연산홍이며 돌단풍이며 조팝나무 여린 가지며 취나물이 자라고 있다.
손으로는 낙엽을 집어올리지만 머리 속에는 온통 사유가 진행 중이다.
정연한 논리도 질서도 없이 스쳐가는 단상들로 머리 속은 가지런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며 스쳐가는 대합실의 행인들처럼 사라지곤 한다.
철칙 같은 순환의 이법/ 세대 교체, 공(空)으로의 회귀/
대지를 뚫고 분출하는 무한한 생명력/
한 생애의 출발 시점/ 단정하지 않은 대자연/
이윽고 독백을 한다.
나는 단정함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어떤 풀은 잡초라 여겨 뽑아내고 어떤 풀은 꽃이라 여겨 좋아하는구나.
새로운 시작을 향한 의례처럼 헝클어진 덤불 속을 헤집으며 빗질을 하는구나.
이건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편향된 일인 거야.
대자연은 불결이나 청결, 무질서와 질서 따위의 상대적 구분을 넘어서 있는데
나는 여전히 개끗함을 좋아하는 상대적 이원론에 빠져 있구나.
가까운 곳에서 새 울음 소리가 들린다.
작년 이맘 때 들었던 울음 소리라 더욱 반갑다.
이 봄에 만난 전원의 가객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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