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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청수지가의 묵송 퍼포먼스

  

예전의 문인 사대부들은 지식인으로 정신문화를 선도하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품격있는 유희를 즐기며 삶을 향유했다

시회나 문인화, 가무 등은 그들의 유희요 문화의 산실인 셈이다

그들은 속됨을 싫어하며 아치를 추구하는 로맨티스트들이었다

 

시인 묵객의 모임에는 멋스러운 풍류가 있어야 제 격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사회라지만 문인화라는 사대부 집단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집단이라면

무언가 멋스러운 놀이 하나 쯤은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 멀리 음성까지 와서 1박2일의 특별연수를 가지는데...


 

무릎을 탁 친다

옳지! 내가 바라던 바이거늘...

그것은 바로 묵화 퍼포먼스를 한다며 좌중이 술렁거린 후이다

나는 가설극장에서 영화를기다리던 소년처럼 가슴이 설렌다


예전에 거창의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서화가 중진들의 현장 휘호와 제자들의 공동작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바라보았던 학습 효과가 작용했던 갓인지...... 

자갈 마당 위에 광목이 펼쳐지며 가설 무대를 자리자 달빛이 은은하게 조멍등이 된다

사전에 계획된 이벤트가 아니라 창현선생께서 역간의 취기를 겸한 예인의 풍류가 발동한 것이다

 


나는 풍류의 근원을 떠올리며 환상에 잠긴다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한 줄기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흥으로, 꼴림으로 심신을 달구는 신묘함이리라

바람이 전신에 차오르면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령스런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표현의 충동을 일으키리라

 

밝은 서치라이트를 받으며 세 폭으로 길게 깔린 광목에 창현선생이 오른다

사람이 샤먼이 된다

용이 하늘을 솟구쳐 올라 하늘의 문을 두드리자 신령한 천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샤먼은 정신을 집중하여 소나무의 정령을 불러낸다

유구한 세월을 이 땅에서 뿌리 내리고 살다가 죽어서 영으로 화한 송혼이시여

당신의 무구청정한 본체를 현현해 주시기를 앙청하나이다

추상을 견디며 푸르럼을 잃지 않는 의리와 지조의자태로 나타나기를.....

이 민족의 희망이 되던 웅장한 자태로 나타나기를 ....

이 민족의 눈물을 닦아주며 어깨에 손을 얹던 자비의 화신으로 나타나기를....

 


아이 다리통만한 큰 붓이 풍덩 먹물에 잠기고 하얀 천에 주루루 발자국을 남기며

묵송의 밑둥치를 적시며 단숨에 기운차게 상승하며 천상의 길을 낸다

먹의 향이 사방에 퍼지며 가지를 달고 솔방울이 달린다

늘어트린 솔가지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솔향이 진동하는 장면을 연상한다

소나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곤두세운다 

소나무는 저마다의 얼굴과 성품이 있는 법이지

저마다의 형상과 자태와 향기와 영혼과 꿈을 가진 것이여

 


창현 선생이 붓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외현선생이 화제를 쓴다

둘이 펼치는 합동 휘호는 자연스럽고 낭만적이다

묵송한연이라 하여 한파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한 기상과 창정한 기품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예찬한다

양현이라 불리기도 하는 두 분의 교유는 운명이 맺어준 것인지

이 미술관 부부의 인연의 다리를 놓은 분이 창현선생이다

두 분은 상호 존중과 깊은 친밀감으로 돈독하여 나의 부러움을 받는다

 


창현 선생은 왜 이런 퍼포먼스를 하려고 했을까?

제자들과 내방객들에게 대형 낙락장송을 그려보임으로써

흥미있는 볼거리와 문인화의 품격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더 깊이 음미해 보면 한결 푸른 소나무의 속성을 본받아

고결한 선비의 품성을 배우라는 당부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임으로 맺어진 야러 사람 사이의 인연도 저 상록수처럼 늘 변함없이 푸르고 솔향 그윽하리라

 


퍼포먼스는 완성된 작품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행하는 행위의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행위예술은 시간과 공간 위에서 흐르다가 소멸된다

나는 이 모임의 아웃사이더다

그런데도 멋스러움을 포착하고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두니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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