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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정용 의사 비문

 

         鄭庸 義士를 기리며

 

天地人 共怒한 저들의 임진년 만행에

農山村 義人의 부릅뜬 눈으로

怒濤 같은 義憤을 움켜 쥔 주먹으로

지샌 밤이 어디 며칠이랴.

 

國祿의 빚이라도 있거나 孑孑單身이었거나

이름 석자 떨칠 豪氣로운 영웅이었더라면

가야할 십자가 외길에서 머뭇거리지나 않았으련만

조카들을 데리고 동지들과 규합하여

정의의 이름으로 하늘에 맹세할 때

이미 제단 위에 바쳐진 희생은 님의 목이외다.

 

늙고 쇠잔한 맨 몸뚱이에

걸친 건 쇠보다 강한 충의의 갑옷

天命으로 무장한 정의의 칼 한 자루

하늘의 뜻을 어찌 알리오!

 

진주성에 阿鼻叫喚으로

鮮血 샛강처럼 흐르던 날

五臟六腑에 남은 기력 죄다 쏟아내고

矗石 아래로 장렬하게 떨어지는

대장부의 꽃 한 송이

(필자노트: 본 졸시는 제가 정 용 의사의

숭고한 구국헌신의 정신을 추모하여 쓴 글입니다.)

 

 

 

 

 

 

(본 자료는 정태홍 대종회장님께

보내드릴 비문 초안입니다)

 

정 용 의사 유적비 (鄭 庸 義士 遺蹟碑)

의사의 이름은 용(庸)이며, 진양 정씨 은열공(殷烈公) 신열(臣烈)의 후손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중재(中齋)이고 1539년(중종 34)에 갈천리(오늘의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서 태어났다. 기개가 꿋꿋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무인이면서도 사군자(士君子)의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임진년, 왜구의 변란을 당하자, 공은 형의 아들인 익주(翼周)와 광주(光周), 종형의 아들인 이례(以禮), 상례(尙禮)와 함께 가동(家僮)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김 면(金 沔)의 휘하에 들어갔다. 김 면은 그를 의롭게 여겨 함께 군영의 일을 논의하였으며 매우 신임하였다. 적과 접전할 때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충의로운 사람이다.”고 칭찬하였다. 김 면이 의병대장으로 우현(牛峴)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공이 즉시 찾아가 적을 토벌할 계략이며 변화에 대처하는 기지를 설명하여 진중의 모든 이를 감탄시켰다. 김 면에게 청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낙동강 하류의 적들을 추격하여 토벌하겠다고 하자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섣불리 먼저 적에게 달려가지 마시오.”하였으나 용감하게 달려 나가 적의 깃발을 꺾고 목을 벤 것이 십여 급에 이르자 적은 패배하여 도주하였다. 적들의 각종 물자를 노획하여 바치자 그 소식을 영문(營門)에 치보(馳報)하였고 마침내 공을 문경의 임시 수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은 “나는 무인으로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임무이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별장(別將)으로 임명된 후 안음과 언양에서 적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김 면이 진중에서 병사한 후 정성으로 장사를 지내고, 진주로 달려가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 들어갔다. 병사는 연로한 공에게 귀가를 종용하였으나 공은 가사를 정리한 후 다시 진중으로 달려갔다. 공에게 최후의 전투인 진주성 싸움에서 “오늘 이 자리가 내가 죽을 곳이다.”하며 사생결단의 투혼으로 황 진과 함께 선두에 올라 일진일퇴하며 적을 무수히 죽였다. 진주성이 함락되는 최후의 순간에 “우리가 적의 칼날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하고 결국 조카들과 함께 촉석 밑으로 투신하였다. 이 때가 계사년(1593, 선조 26) 6월 29일 공의 나이 55세였다. 숙묘조(肅廟朝) 을미년(1715)에 황암사(黃巖祠)를 세워 사액(賜額)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 왔으며 지금은 황암사에서, 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전투에서 전몰한 위령들과 함께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본 비문의 참고 문헌 : 동계 정 온의 정 의사전(鄭 義士傳), 진사(進士) 영천(永川) 최연중(崔演重)의 유사(遺事), 문소(聞韶) 김 황(金 榥)의 의사 정공 유적비(義士 鄭公 遺蹟碑) 

 

 

 

(초안에 참고할 자료입니다)

정 용 의사 유적비 (鄭 庸 義士 遺蹟碑)

 

의사의 이름은 용(庸)이다. 성은 정씨이며 관향은 진양(晉陽)이다.

공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중재(中齋)이고 은열공(殷烈公) 신열(臣烈)의 후손이다.

공은 가정(嘉靖) 18년 기해(1539, 중종 34) 10월 1일 갈천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훌륭하고 기개가 꿋꿋하였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였으며, 의기가 높아 큰 뜻을 지니고 용맹이 뛰어났다. 주위에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떨쳐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공은 무예를 익혀 맨 손으로 호랑이의 목을 조르거나 목표물을 정확히 쏘아 맞히는 정도는 손쉬운 기예에 속했고 심오한 병법까지 통달하여 막히는 것이 없었다. 또한 공은 무인이면서도 항상 사군자(士君子)의 지조를 지니고 있었기에 나라에 대한 충성과 헌신 그리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목숨을 바쳐 응징하는 의사로서의 뜨거운 생을 보냈다.

 

 임진년, 왜구의 변란을 당하여 큰 성이며 고을이 와해되고 감사와 수령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다. 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탄하여 이르기를, “고기 먹는 고관은 계책이 없고 수염 난 아녀자는 용맹이 없어 마침내 이 나라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차마 우리 군부(君父)를 오랑캐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도 시원치 않다.”하였다.

마침내 공은 형의 아들인 익주(翼周)와 광주(光周), 종형의 아들인 이례(以禮), 상례(尙禮)와 함께 가동(家僮) 수십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김 면(金 沔)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의분에 겨워 말하기를, “이처럼 나라가 위급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한 처지에 내 비록 늙었으나 어찌 뒤로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 면은 그를 의롭게 여겨 항상 가까이에 두고 함께 군영의 일을 논의하였으니, 공을 신임하고 존중하는 정도가 여느 참모나 사자(士者)보다 더 했다. 적과 접전할 때마다 5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용맹이 여러 군사들보다 뛰어났으니 김공은 늘 칭찬하기를, “충의로운 사람이다.”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충공(文忠公) 김학봉(金鶴峯)이 초유사(招諭使)로 영남에 당도하여 송암 김 면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우현(牛峴)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이 즉시 찾아가 적을 토벌할 계략이며 변화에 대처하는 기지를 설명하여 김 공을 감탄시켰고 그 이후로 김 공은 군영에 관한 일을 반드시 공에게 먼저 물어본 뒤에 행동에 옮겼으며 공 또한 전심전력으로 계책을 세워 실수를 범한 적이 없었다. 당시 평양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가슴을 치고 통탄하며 김 면에게 청하여 자기에게 소속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낙동강 하류의 적들을 추격하여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김 공이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섣불리 먼저 적에게 달려가지 마시오.”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곧 나의 뜻입니다. 내가 만약 나약하게 겁을 낸다면 어느 누가 명령을 따르겠습니까?”하였다. 그리하여 용감하게 달려나가 적의 깃발을 꺾고 목을 벤 것이 십여급에 이르자 적은 패배하여 도주하였다. 그들의 각종 보물과 물자를 노획하여 김공에게 바치자 김공은 장하게 여겨 그 소식을 영문(營門)에 치보(馳報)하였다. 이 당시 우감사(右監司)였던 김학봉이 공의 공로를 낱낱이 들어 조정에 알린 뒤에 공을 문경의 임시 수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은 “나는 무인으로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임무이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취임하지 않았고 학봉은 그 뜻에 감탄하고 공을 별장(別將)으로 삼았다. 계사년 봄에 안음과 언양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던 적을 습격하여 적의 목을 베고 물자를 노획한 수량이 매우 많았다. 본진에 돌아왔을 때 송암이 군영에서 병사하자 공은 통곡하며 시신을 염습하여 임시로 가야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주로 달려가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 들어갔다. 최 공은 그 충의를 장하게 여기고 공로를 치하하며 말하기를, “한 고을의 외로운 성이 그대를 얻어 든든하게 되었다.”고 하고 마음을 함께하여 성을 죽음으로써 지키자고 맹세하였다. 이 당시 병사 황 진(黃 進), 창의사 김 천일(金 千鎰), 의병장 임 계영(任啓英), 복수장 고 종후(高 從厚)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공의 계책과 지략에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당시의 진주성은 적들이 사방에서 조여들어와 극히 위태롭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공은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오늘 이 자리가 내가 죽을 곳이다.”하고 마침내 황 진과 함께 선두에 올라 돌격하여 적을 무수히 죽이자 적병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진일퇴하며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적들이 강둑을 터 성안으로 물길을 돌리는 수공작전으로 성곽이 물에 잠기고 무기가 쓸려나갔다. 공은 최후의 순간에 대창과 각목만 가지고 접전을 벌였으나 파죽지세를 막을 수 없었으니 아! 진주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공은 두 조카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적의 칼날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하고 결국 두 조카와 함께 촉석 밑으로 투신하였다. 이 때가 계사년(1593, 선조 26) 6월 29일 공의 나이 55세였다.

공이 순절한 후 12년만인 을사년(1605, 선조 38년)에 안문사가 관문을 보낸 것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공의 아들 상주가 “아비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삼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결국 급복(給復)의 은전을 받지 않았다

 

 진양 정씨 가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는 경(경)으로 영광 군수를 지냈고, 증조는 원신(元愼)으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냈으며, 조부는 순(純)으로 충의위 부사용이다. 선고(先考) 몽서(夢瑞)는 첨정(僉正)을 지냈고 호는 팔완당(八玩堂)인데 갈천 임 선생의 문인이다. 선비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선무랑(宣務郞) 인유(仁裕)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구례 장씨로 양정공(襄貞公) 필무(弼武)의 따님인데 품계를 올려 숙인(淑人)에 봉해졌다. 아들 상주(相周)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딸은 진양 강 함(姜 諴)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셋인데 맏이는 이룡(以龍)으로 다른 곳으로 출계(出系)하고 다음은 이호(以虎)이며 다음은 이표(以彪)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이호의 아들 동망(東望)은 생원(生員)에서부터 문과(文科)에까지 급제하여 찰방(察訪)과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동계(桐溪) 정 온(鄭 蘊)와 같은 대현(大賢)과 진사 영천(永川) 최연중(崔演重)이 그 당시 보고들은 사실을 직접 기록하였으니 그 말씀이 후세에 전해지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공의 자손이 몇 대 이후로는 힘이 미약해짐으로 인해 그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 나라로부터 포상을 받거나 증직이 내려지는 은전을 입지 못하고, 세상에서 고사를 논하는 자들도 일반적으로 평소의 관습에 젖어 어렴풋이 그 명성만 거론할 뿐 숨겨진 깊은 내막을 가려 따져 보지도 않은 상태로 오늘에 까지 이르고 보니, 마침내 후세에 전해질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되었다.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정 공을 고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추모하기에 이르렀다. 안의 고을의 사림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기를, ‘이미 지나나간 유감스러운 일이야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앞으로 영원한 장래가 있으니 그 유감을 만회할 가망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돈을 갹출해 계를 조직하여 마을 유허에 비석을 세워 공의 유적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살펴보니, 숙묘조(肅廟朝) 을미년(1715)에 숙종) 황암사(黃巖祠)를 세워 사액(賜額)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 왔었다.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곽 충열공(郭 忠烈公)과 조 충의공(趙 忠毅公) 두 선현을 모시며 비록 때와 전장(戰場)은 달랐지만 정 공도 함께 황암사 별사(別祠)에 제향을 올린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한말의 쇠잔한 국운과 더불어 중단되고 일제 하에서는 아주 없애버렸으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가 발족되어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추모제를 올리며 의사의 고귀한 충의 정신을 새기며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본 비문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인용처를 밝혀 둔다 : 동계 정 온의 정 의사전(鄭 義士傳), 진사(進士) 영천(永川) 최연중(崔演重)의 유사(遺事), 문소(聞韶) 김 황(金 榥)의 의사 정공 유적비(義士 鄭公 遺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