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골에 유거한다고 해서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명멸하는 도시에서 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도시의 삶을 엿보고 은근히 즐기기도 하는 이중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적 교양을 증진 시키는 서적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 시키고 연결하는 가교가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에 대해 호기심과 존경심이 솟아난다.
그의 학문 자체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배우고 본받고 싶다.
그는 파리의 상층 문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불건강과 허위와 가식을 폭로하고 공격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예리한 학문이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푸념이나 불평을 쏟아내는 정도일 뿐이지만........
내가 블로그나 일상 대화에서 논리적 맥락 없이 툭툭 쏟아내는 말들을
이론적으로 연결지어 보면 부르디외의 이론과 상통하는 면이 더러 있다.
내가 그에게로 다가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의 <구별짓기> 개념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독창적 개념인 <아비투스>에 관해 공감을 하게 되고 더욱 친밀해 진 것이다.
아비투스는 영어의 habit, 우리 말로는 습속이다.
개인의 아비투스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성향>이다.
개인의 구조화된 성향 체계인데 무의식적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개인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일정하게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교원이었던 나는 은연중에 남을 가르치려는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믹스 커피, 뽕짝조의 대중 가요, 전국노래자랑을 즐겨 보는데 비해
대학가의 젊은이들은 원두커피, 클래식 음악, 음악회 공연을 즐겨본다.
개인적인 문화적 취향과 소비 생활의 취향이 있다.
그런 취향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적 취향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 교육 환경, 계급 위상에 따라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취향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권력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아비투스는 일반인들에게 상징적인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재벌들의 호화판 결혼 문화, 일부 상류층만의 전유물인 클럽 문화,
일부 상류층의 은밀한 사교장인 최고급 의상실, 세습형태의 재벌 구조, 명품 소비,
고액의 골프장 회원권과 헬스장 회원권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 정도의
아비투스가 실제로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적 폭력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반인들을 실의와 좌절의 늪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또한 상류층이나 권력층들의 취향이야말로 보편적이고 우월하고 고상한 것으로
그리고 일반 계층의 아비투스는 저열하고 추하고 열등한 것으로 몰아 붙여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 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하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권력 집단의 문화적 지배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 폭력이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행사되는 곳이 학교라고 한다.
부르디외는 학교가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단적인 예를 들어 요즘은 전통 음악이 교육과정에 많이 반영되었지만
아직도 서양 음악은 현대적이고 고급스럽다는 인식을 가르친 곳이 공교육 즉 학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판소리는 열등하고 저급이고
서양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는 우수하고 고급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초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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