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의 대화 중에 감정 표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적이 있다.
나는 대체로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감정 이입과 감정 표출을 하는 편이다.
감수성의 더듬이로 사물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과 글로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이에 비하여 절친인 S는 표현을 자제하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기를 좋아한다.
자신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그저 덤덤하다고 한다.
나는 꽃 한송이 나무 한 그루에도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느낌을 표현하고
친구는 언어의 절제와 침묵으로 표현은 적극적이지 않지만 수석 탐사를 좋아하고
주택에서 풍기는 아치(雅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감정과 인식작용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만약 인식 작용만 가진다면 사람이 컴퓨터나 다를 바 없을 것이며
감정 작용만 가진다면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욕망이나 감정을 억압하고 절제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물론 개인의 취향, 성격, 가치관 등에 의해 선택할 문제이지 정답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념무상을 통해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육체적 욕망을 이성에 의해 통제,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에의 의지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물질과 과학의 진보를 가져왔지만
그로 인해 고통은 더욱 커진다고 보아 욕망의 절제를 주장한다.
유학에서는 감정이 삶의 윤기를 가져오는 것으로
시, 음악이 모두 정에서 나와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정을 무제한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악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경계를 한다.
유학에서는 감정보다 본성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공자는 어떤 분이었을까?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는 배부르게 먹지 않은 분이다.
어떤 음악을 듣고는 고기맛을 잃었다고 할 만큼 감정이 풍부한 분이었다.
공자는 감정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하지만
근심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맹자는 사단(四端)에서 측은, 사양, 시비, 수오를 정이라고 보고
이것이 도덕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맹자는 군자가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인과 예라고 보았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예는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인 것이다.
장자는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얻는 것에는 때가 있는 것이고 얻은 것은 잃는 것이 순리라고 한다.
때에 편안하고 순리에 따르면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기쁜 일이 있다고 해도 나중에 슬픔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쁨과 슬픔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현대는 감정을 예찬하는 시대가 되었다.
드라마, 영화, 음악, 문학, 패션 등은 감정을 표출하는 예술 장르다.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표출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한다.
나는 친구가 감정을 은은하게 드러내면서 표현을 절제하는 좋은 점을 배운다.
어찌보면 나는 호들갑을 떨 정도로 표현에 수다가 심하다.
옛날 어른들이 보면 긴 곰방대로 머리통을 한 방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인이나 예인들에게는 그런 섬세한 감성은 창작의 필수다.
제 아는 만큼, 제 원하는 만큼 그리고 제 꼴대로 살아가는 법이지. 뭐
'사랑방 담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 일족과의 인연 (0) | 2016.09.07 |
---|---|
소유에서 존재로 전환하는 삶 (0) | 2016.09.01 |
도자기 한 점 - 연당에 걸터앉은 보살 (0) | 2016.08.26 |
모두 다 사랑하리 - 겸애(兼愛) (0) | 2016.08.15 |
담배 이야기(1) (0) | 2016.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