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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담화

패션이 맥을 못추는 사회를 부러워하며

 

연일 매스컴의 표적이 되는 한 여인의 벗겨진 신발 한 개에 세인들의 공분과 함께 관심이 집중된다.

어떤 이들은 오로지 그 여인의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 같은 치장을 은근히 부러워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패션을 좋아한다.

그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미끈한 모델들이 연출해 내는 최신 유행의 의상을 보며 혼줄을 놓는다.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들을 갖기 위해 눈이 충혈되고 온 마음을 빼앗긴다.

최고급 자동차, 최고급 주택은 마치 성공의 상징처럼, 인생의 목표처럼 착각하는

세상이 되기도 하니 망연자실이다.

 

 

 

 

인간을 허영의 존재로 사유한 파스칼의 말이 역시 옳은 것 같다.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이고 추악한 단면을 직시하고 있다.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유는 한낱 이상일 뿐이라며 씁쓸해 한다.

 

 

사람은 누구나 겉치레를 좋아한다.

 변화를 구하려고 새 옷을 입고 예쁜 옷을 입고 남들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런 욕구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작동할 때 파생되는 문제인 것이다.

 

 

 

 

상류층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경제적 부를 이용해 중산층과 구별짓기를 한다.

중세 시대에는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민주사회가 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자

상류층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신분의 과시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욕구를 간파한 산업자본가들의 교묘한 전략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커다란 문제를 유발하는 패션은 자본주의의가 초래한 현상이다.

패션이 맥을 못추는 사회란 불가능한 것일까?

 

대학에 다닐 때 어느 교수님 한 분은 군인들이 신는 워커를 신고

스님들이 쓰는 밀림모자 차림의 매우 기이한 차림으로 다니셨다.

혹시 그런 차림을 통해서 패션에 목을 매는 우매함을 고발하는 퍼포먼스인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주체로서의 개인적이 자각이 필요하다.

과연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 행복한 사람을 살아가려는 가치 판단의식과 비판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특히 중산층들을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산업자본가들의 끝없는 유혹과 은밀한 홍보 전략에 우리는 끊임없이 최면을 당하고 있다.

산업자본의 소비 논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다.

 

(성철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