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아로니아 밭 일을 며칠 째 거들어 준다.
친구는 수확한 열매를 팔기 전에 함께 일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몫을 먼저 챙긴다.
친구가 나누어 주는 그 몫은 품삯이 아니라 사례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품삯이라면 나는 당연히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품삯이 많고 적은 것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복중 더위에 꼭두새벽부터 일을 한다는 것은 고역이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Kg당 8천원을 주고 사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아침 때가 되면 콩국수를 갈아서 밭에까지 싣고 온다.
함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노조를 결성해서 밭주인과 협상을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투쟁을 하자고
농을 걸면 주인이 얼른 사 오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했다면서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기도 한다.
일하는 이들은 놀이에 취한 아이들처럼 즐거워한다.
시간은 어찌나 빨리 가는지, 수확한 열매가 수북히 쌓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올해 일하는 일꾼들은 선발된 사람이 아니다. 밭주인인 친구의 매우 친밀한 지인이다.
나를 비롯해서 경상도말로 반거치 일꾼들인 셈이다.
전문적으로 수확하는 여성은 손길이 번개처럼 빨라서
하루에 100Kg을 너끈히 수확하기도 한다는데
우리가 하는 일량의 두 배가 넘을 것 같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 행위는 모든 노동을 돈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환산한다.
주인이 능률을 올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손이 빠른 아주머니를 고용해서
하루 일당 6만원만 주면 된다. 콩국수를 삶아줄 필요도 없다.
친구는 작년에는 수확물을 알음알음으로 확보한 고객들에게 택배로 보내고서
수백 만 원을 벌었는데 올해는 재배하는 농가가 많아서 절반도 채 안 된다고 한다.
친구가 수확물을 파는 행위는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판매 행위다.
반면에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무관한 전(前)자본주의적 행위다.
이것은 고용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는 상부상조 즉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로니아 밭에서 일하는 주인과 친구는
소유적 삶에서 오는 갈등과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적 삶에서 누리는 웃음과 농담과 기쁨이 오간다.
나는 주인과 동일시한다.
내 밭처럼 자발적이고 부지런히 일을 한다.
옷에 땀범벅이 되어도 우리는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다.
이 밭에는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가 뒤섞여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은근한 비판과 조소와 비아냥을 즐기기도 한다.
밭에서 일하는 내 머릿 속은 이런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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