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잊지 못할 추억 몇 가지가 떠오른다.
유월 유두(流頭)에 모를 심어놓은 논의 물꼬 입구에 떡을 두고 조상신에게 감사하는 <논고시>라는 세시풍습이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소쿠리를 한 개 들고 나가면 운이 좋을 때는 가득 떡을 채워 오기도 했었다.
음력 시월이면 묘사를 지내는데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수를 나누어 주곤 했다.
우리는 학교를 파하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년에 몇 번 없는 공짜 떡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떡을 분배하는 데는 공정한 원칙이 있었으니 머리 수대로 분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이면 많은 음식을 받아오기 위해 어린 동생들까지 데리고 가서 두둑하게 떡을 받아오곤 했다.
(PAULOS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어릴 적 면민체육대회를 할 때 본부석 천막 앞에는 새끼줄에 낀 세로로 길게 늘어트린 하얀 종이가 펄럭였다.
체육대회를 지원하는 기부자 이름과 금액이 적힌 것이었다.
때로는 적잖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당당한 위신을 내세우기 위해 기꺼이 투자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사회 전제가 가난했지만 이렇게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데 익숙했다.
그럼으로써 하늘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경주 최부자 가문의 가훈은 가히 감동적이다.
이 당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존경받는 부자의 가훈을 보며 인간애로 훈훈해진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데 비해
고대사회로 갈수록 부를 지출이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말하면 증여의 사회였던 것이다.
가진 것을 후하게 나누어 줌으로써 존경과 위신을 얻게 되는 상징적 교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증여의 논리는 자본주의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사회현상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부가 극소수에게 집중되고 그런 구조가 고착화 되고 세습되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대 역사 속에서 소수 부족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증여의 논리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증여의 미덕을 보다 확산 시켜 나가는 한편
국가는 법이나 제도 등을 통해 기증, 기부 문화가 정착되고 부가 재분배되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사랑방 담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뱃돈에 대하여 (0) | 2017.09.01 |
---|---|
자린고비 이야기 (0) | 2017.08.31 |
방아깨비 그림을 감상하며 (0) | 2017.08.29 |
아로니아 한 상자의 의미 (0) | 2017.08.27 |
유행을 누가 만드는가? - 폴더폰 유감 (0) | 2017.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