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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선친의 유훈

 

선친께서는 「새 출발을 하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반복하시며

자식 훈육에 박차를 가했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 노여움을 풀었던 엄한 훈장이었다

 

10년만에 본 귀한 아들이지만 당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이탈한다고 여겨지면

엄한 질책으로 교정하시며 새 출발론을 세뇌하셨다

말하자면 인간 개조론이나 정신혁명에 기초한 훈육론인 셈이다

 

선친은 일본에 징용을 당한 혹독한 청년 시절을 겪었고

40대 이후에는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운동을 목격하신 분이다

1920년대의 일본 우익이 주창하며 거센 운동으로 번졌던 국가개조론과

1960년대 박정희의 인간개조론이

선친의 새 출발론의 사회적 배경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릎을 꿇은 채 그렁그렁한 눈물로 주입 당하며

당시에는 무언의 반발심마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아버지가 한없이 그립다

사별한지 30년이 지나 독재자처럼 군림했던

그 말씀에 담긴 엄격함이 바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었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손자를 보러 오신 선친과 3대가 함께, 1983)


새 출발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다

부정의 변증법인 것이다

탄생이 무에서 시작하는 첫 출발이라면

과오로 점철된 지난 삶을 성찰하고, 통회하며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주도적인 삶의 변화와 변혁인 것이다

 

삶은 시공에 분사되는 말랑말랑한 재료다

매 순간마다 삶의 현장에서 생각과 의지와 행위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며 불확실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인간이다

한없이 나약하고 모순 투성이인 존재!

그러면서도 자신의 약함을 알고 수정하며

더 나은 존재로 꿈을 꾸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반 세기 전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이 고인다

「잘못했습니다

말씀을 명심하며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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