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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고경명의 무등산 산행기 '유서석록'을 읽으며

 

유서석록(遊瑞石錄)이란

고경명 선생의 무등산 산행 기행문을 읽고

내 블로그에 옮기며 그 느낌을 생각나는대로 적어 본다.

 

나는 14대 직계조부인 정용 의사와 관련된

기록물들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진주성전투에서 두 조카와 함께  순절하신 분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조선사회는 신분사회로서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혁혁한 전공과 순절에도 불구하고

왕조실록에서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분이기에

후손으로서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갈천 임훈 선생은 정용 선조보다 39년 연상이신데

바로 이웃하는 향리의 명문대가의 이름 높은 학자요,

큰 벼슬에 오른 분이라 밀접한 관계가 궁금했었는데

기록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었다.

 

 

본 기록을 보고 유추해 보건대

정용 선조는 갈천선생의 문하에 있으면서

진양정씨 문중의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으며

갈천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당시 35세였던 선조가 되어

당시의 상황으로 몰입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분이 되어서.....

거창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간다.

 

 

말로만 듣던 서석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좋다지만

존경하는 스승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선비와

교유하는 기쁨이 아무리 크다한들

광주까지 선뜻  걸어서 나선 도전적 용기와

신체적 강건함에 놀라게 된다.

 

 

 

 

이런 소중한 사료를 보면서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명망 높은 학자요, 광주 목사라는 벼슬에 오른 선생이

멀고도 먼 광주까지 여러 사인들을 초청했을까?

 

 

순전히 산천을 유람하는  눈요기를 넘어서

과연 그들은 갈천선생에게서 어떠한 가르침을 받은 것인가?

그들은 학문적 지향이나 취향이 비슷한 동지적 관계로

결속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이다.

 

      

 

본 기행문이 쓰여진 18년 후

아!  임진란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조선 반도를 강타하게 된다.

 

고경명 의병장은 금산에서 자식과 함께 순절한 분으로서

대의를 위해 소아를 초개 같이 버린

그 고귀한 죽음이 정용 선조와 일치한다.

참고로  선생은 정용 선조보다 6년 연상이시고

1년 먼저 임진란 첫해에 순절하였다

 

 

 

 

 

당시 서석산에 오른  동행자들은 모두 성씨가 다른 것으로 봐서

 의도적인지 우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문중 위주의 폐쇄적 모임이라기보다

각 지역의 여러 성씨 중에서 선생을 추종하는

명한 선비와 동행했다고 추측을 해본다 

 

 

이런 모임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대승적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구국의 이념적 동지가 되는 모임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남명 조식선생과 갈천 임훈 선생 같은 유학의 거두들은

당시의 선비들에게 대의를 위해서

목숨마저도 초개같이 여기는 실천궁행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 나타나는 선비들의 자연관에 접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된다.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묘사,감성적 아름다움은 물론

평소에 자연에 대한 외경과 찬미과얼마나 생활화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자연과 더불어 지인과 함께 소통하는 즐거움이

이  글의 구석구석에서 엿보인다

 아름다운 풍류에 부러워진다.

 

언젠가는 무등산 산행을 하면서

이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풍류를 되새겨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