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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스크랩] 갈천선생(葛川先生)

 

 

 

 

                                                                                                                                                      갈천선생의 소박한 생가 자이당.

 

 

                       

 

 

 

                                                                                                                갈천과 첨모당의 문집 책판을 보관한 장판각의 안내문

                                                                                                               후손들이 선생의 글들을 모아 문집을 엮으면서 서문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갈천선생(葛川先生)

                                                                                             글/송악 

 

 

 

 

 

 

 

 

 

              碣銘幷序(갈명병서)

 

 

葛川林先生, 諱薰, 字仲成, 其先恩津縣人, 自號自怡堂, 最晩又改枯査翁, 人稱之曰, 葛川先生

갈천 임선생의 휘는 훈이요 자는 중성으로 그 선조는 은진고을 사람이다.

자호는 자이당으로 만년에는 고사옹으로 고쳤다.

사람들이 부르기를 갈천선생이라 했다.

 

(....중략....)

 

진무(眞懋)가 선생의 묘비명(墓碑銘)을 나에게 부탁한지 오래되었다. 흐르는 세월에 완성하지 못한 채 있으면서, 항상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돌아가 다시 옛날에 읽던 글을 정리하여 불후(不朽)의 전기(傳記)를 쓸까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오랑캐들이 졸지에 들이닥쳐 임금을 모시고 외로운 산성(山城)으로 들어옴에 국가의 위망(危亡)은 조석으로 박두하게 되었다. 한 번 죽는 것은 한스러울 것 없으나, 명현(名賢)을 찬양하는 일을 이루지 못할까 깊이 두려워하여 포석(砲石)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삼가 그 대강만을 위와 같이 정리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쓰는 바이다.

명(銘)에 이른다. 우뚝 솟은 저 덕유산, 높이 하늘까지 닿았네. 신령한 정기 빚어, 우리 명현 낳으셨네. 나 그분 생각하니, 옥같이 윤택하고 금같이 純精(순정)하네. 江河(강하)같은 도량이요, 鸞鳳(난봉)같은 형상이라. 앉은 자리에 봄바람 일고, 和氣(화기)가 두터웠네. 孝(효)와 悌(제)로 齊家(제가)하고 忠(충)과 信(신)은 본성이라. 誠(성)으로 남을 대하고, 敬(경)으로 몸을 간직하였네. 性理(성리)를 궁구하여 經典(경전)을 探討(탐토)하니, 책은 손을 떠나지 않아 늙을수록 부지런하였네. 잘못을 알면 고치니 蘧伯玉(거백옥)의 風度(풍도)요, 남을 대하여 부끄럽지 않으니 司馬君實(사마군실)의 공부로다. 들어가 임금 섬기니 孟子(맹자)의 敬(경)이며 朱子(주자)의 학문이요, 나와서 백성을 다스리니 봄 가뭄에 단비였네. 하늘이 풍부히 부여하시고도 왜 크게 쓰지 않았는고! 조촐한 百里(백리) 牧使(목사)에 백발만 쇠하였네. 산골에서 소요하니 자이당이 즐거웠네. 蘊蓄(온축)한 덕 다 펴지 못했으니, 때가 可惜(가석)하구나. 그러나 선생의 道(도)는 窮達(궁달)로 損益(손익)되지 않으며, 선생의 風敎(풍교)는 存亡(존망)에 따라 熾熄(치식)하지 않는다. 온산이 크게 변해도 선생의 명성은 어제와 같으리라.”

 

                                                                                    皇明崇禎 (황명숭정)9년 병자년 月 日

                                                                                                 八溪(팔계) 後人(후인) 鄭蘊(정온) 撰(찬)하다.

 

 

이상 글은 洞溪(동계) 鄭薀(정온)(1569~1641)선생께서 쓰신 갈천선생의 묘비명 중 일부로서, 정일균교수 著 [葛川(갈천) 林薰(임훈)의 生涯(생애)와 思想(사상)]에서 빌려왔습니다.

 

 

 

 

내용인 즉, 갈천(葛川)선생의 손자 진무(眞懋)로부터 글을 써달라는 청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관직을 떠나서 산으로 돌아가, 옛날에 읽었던 선생의 글들을 정리해서 불후(不朽)의 전기를 쓰려던 참에 그만 국난(國難)을 당했으니, 불가피 임금을 모시고 피신한 산성에서, 삼가 갈천선생의 일대기를 대강 정리하고, 비문으로 새길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난히도 심했다는 그 해 병자년 섣달의 엄동과 설한,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지휘하는 청병들에게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춥고 배고픈 병졸들과 함께 적군들이 쏘아대는 포탄을 피하며 몽진(蒙塵)한 임금을 지켜야했던 이름하야 병자호란( 丙子胡亂)! 그 절대 절명의 와중에 동계(洞溪)선생께서는 갈천(葛川)선생의 묘비문을 쓰셨던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청태종에의 항복의식, 치욕의 역사로 기록되는 인조임금의 ‘삼전도 굴욕’이 결정된 날 아침에, 동계선생은 할복을 결행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쇠한 노인이었던 동계선생은 다행히도 주변사람에 발견이 되어 생명을 구하시고, 낙향하시어 원하던 산으로 들어갔으니, 바로 북상의 강선대 마을 뒷산 모리재(某里齋) 이다.

선친 역양(嶧陽)정유명(鄭惟明(1539~1596))선생의 스승이기도 한 갈천선생을, 이토록 존경하고 흠모했던 동계선생께서 남긴 절창의 신도문글을 바탕삼고, 책 ‘갈천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 기타 역사서를 참고하며 갈천선생의 일대기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갈천선생은 1500년,燕山君(연산군)6년에 태어나시고 1584년, 선조(宣祖)17년에 서거하셨다.

선생의 성씨는 은진임씨로, 은진미륵보살로 유명한 관촉사가 소재한 본관 논산시 은진면에는 은진임씨 집성촌으로 수백 호를 이루고 있다.

고조부 諱(휘) 湜(식)이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면서 경상도 함양현으로 이주하였는데, 증조부 휘 천년(千年)께서 선무랑(宣務郞) 의령현감을 지내면서 안음현 갈천동에 터를 잡으니 바야흐르 600여년의 세거지가 되었다. 조부 휘 자휴(自庥)께서는 여절교위 사용(司勇)의 벼슬을 지냈으며, 부친이신 석천공(石泉公) 휘 득번(得蕃)께서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으나, 시절이 하 수상한때라 벼슬길의 꿈을 접고 초야에 은거하며 전형적인 처사의 길을 걸으셨다. 모친은 대대로 명문가계보를 계승한진주 (晉州) 강씨(姜氏) 가문에서 출가해 오신 분인데, 선생은 5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위로 형과 아래로 네 번째 아우가 요절하여 3형제의 장남이 되었다.

두 아우 도계(道溪) 英(영)과 첨모당(瞻慕堂) 운(芸)과는 14살과 17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왕조실록에도 기록 될 만큼 형제애가 도타웠다. 세 형제분의 돈독한 우애를 귀감으로 삼아, 세분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종파(宗派)와 중파(仲波) 계파(季波)로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명문가(名文家)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큰 인물로서의 바탕과 품성을 타고난 선생은 소년기의 성장에 부친 석천공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부친 석천공은 30세에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의 혼탁한 정국 탓에 출사를 단념한 분이다.

폭군 연산군의 재위기간(1495~1506)중, 부패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도전했던 신진 사림파의 정치개혁 시도가 처절한 정치보복을 당하며 실패하게 되는 1498년의 戊午士禍(무오사화), 1504년의 甲子士禍(갑자사화)를 연이어 목도한다. 이에 사림의 일원으로서 현실정치의 모순에 실망하고, 특히 동향의 대학자로서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 一蠹(일두) 鄭汝昌(정여창1450~1504)선생께서 억울하게 참화를 입게 되는 과정을 보고는 크게 절망했던 것이다.

뒤이은 중종 반정이후, 이미 40대의 나이가 된 중년의 석천공은,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조광조를 앞세운 개혁파들의 도전이 또 한 번 좌절하는 己卯士禍(기묘사화)를 보고서는, 모든 꿈을 버리고 산수 좋은 고향에서 두문불출  經明行修(경명행수)를 한다. 조용히 경학을 익히며 심신을 수련하는 한편, 북상에서도 가장 깊은 오지인 산수리 서북쪽 골짜기에 磨學洞(마학동) 서당을 짓고 갈천, 도계, 첨모당 3형제의 자녀훈육에 공을 드리니 석천공의 생활철학과 학문관은 세 자제들에게 전수가되고, 자제들이 큰 인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장남 갈천은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인 이때를 즈음하여 進士(진사) 兪瑍(유환)의 따님이자 文僖公(문희공) 兪好仁(유호인)의 손녀인 고령 유씨에게 장가를 들였는데, 훗날 갈천은 문희공을 존경하고 추모하여 글을 남기기도 했다.

 

 

1519년에 일어난 己卯士禍(기묘사화)는 막 20대에 들어서는 갈천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靜菴(정암)()趙光祖(조광조,1482~1519)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파들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새로이 들어선 중종조의 초기에, 대대적인 개혁정치를 펴면서 일정기간 성과를 이룬다.

그러나 과격한 급진개혁정책은 수구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오니, ‘走肖爲王(주초위왕)’사건이란 계략에 걸리고, 역모로 몰린 정암 조광조선생은 사약을 받게 되며, 신진 사림파는 몰락하게 되는데, 이 사건에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 선생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金安國(김안국)선생까지 연루가 되어 파직을 당한다.

士林들이 추구한 朱子的(주자적) 道學(도학)政治(정치)가 반대파들의 奸計(간계)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 멸문지화까지도 당하는 혼탁한 정치판을 보는 젊은 청년 士林(사림) 갈천의 상심은 매우 컸다.

시절이 불운하니 세간에의 진출보다는 고향의 아름다운 산수 속에 은둔하여 經明行修(경명행수) 하리라.

智者(지자)는 물을 즐기고 仁者(인자)는 산을 즐기나니, 浩然之氣(호연지기)를 쌓으며 학문과 수행에 일로 정진했다.

학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저술부터 일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부친 석천공의 가르침에 따라 어린 배움 시기에는 글짓기를 아꼈었던 선생은, 이 시절에 [靈覺寺重創記(영각사중창기), 三水庵(重創記삼수암중창기), 書兪子玉遊頭流錄後(서유자옥유두류록후), 등의 글을 남기고, 삼수암 道澄(도징)스님의 청에 답하여 送澄上人遠遊序(송징상인원유서)의 글을 쓰고, 인근 山寺(산사)와 마학동 서당을 수행처로 修己(수기)공부에 더욱 전념한다.

그러다 선생의 나이 27세 되는 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니, 두 아우와 함께 ‘朱子家禮(주자가례)’를 철저히 준수하는 3년 상을 치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복케 하였다.

이는 ‘주자가례’가 조선의 사대부가들도 보편적으로 실행되기 직전이라, 선생이 치룬 상례는 선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바뀌고 정국에도 변화가 있어, 士林(사림)들의 등용과 함께 존경하는 김안국선생까지 조정에 재 서용되니 선생께서도 긴 은둔의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출사를 결심했다.

41세 적지 않은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 최고성적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더니, 연이은 사화의 영향을 받았던 당시 성균관의 실태는 매우 실망스러운 분위기였다.  추구해오던 사상과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괴롭기만 하는데, 재능 많았던 사랑하는 아우 道溪(도계)의 비보를 듣게 되고, 다시 을사사화(乙巳士禍) 까지 발생하여 조정에 참혹한 피바람이 부니, 미련 없이 낙향을 해 버린다.

 

歸去來 (귀거래) 逍遙遊(소요유)!

혼탁한 세상을 물러나 맑고 아름다운 고향의 산수에 드니 이아니 즐거울손가!

自怡堂(자이당)을 지키는 은거와 강학생활이 흡족하기만 한 선생은, 50세 넘은 나이에 고향의 鎭山(진산)인 덕유산의 향적봉에도 오르시고, 그 산행기인 [登德裕山香積峰記(등덕유산향적봉기)]를 남기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행기라 할 수 있는 글이다.

1552년에는(明宗(명종7)에는 동향의 후인들끼리 뜻을 모아서, 一蠹(일두)鄭汝昌(정여창)선생을 추모하는 藍溪書院(남계서원)을 건립하는데, 선생께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향리 유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통문을 돌렸고, 부족한 재정을 위해 진력을 다했다.

지곡 개평리 일두선생의 고택과 지근거리에 있는 함양군 수동면의 남계서원은, 영주 순흥의 소수서원(백운동서원) 다음의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서, 훗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유서 깊은 서원이 되었다.

 

한편 선생은 평소 뜻을 나누던 지우 南冥 曺植(남명 조식1501~1572)선생과 玉溪 盧禛(옥계 노진(1518~1578))선생, 아우 첨모당선생 등과 함께 안음현 花林洞(화림동)일대를 노닐며 학문을 토론하고 서로 간의 시 문답을 나누시었는데, 이때 빼어난 산수와 자연을 읊은 아름다운 글들이[남명집][갈천문집]등에 여러 편 전해지고 있다.

 

 

                                안음 玉山洞(화림동의 옛이름)에서 놀며

                                                            詩/남명

                                   하얀 돌에 구름은 천 가지 인데,

                                   푸룬 댕댕이 넝쿨 온갖 형상 자아내네.

                                   이를 다 찾아 묘사하지 말도록 하세!

                                   장차 고사리 캐러 다시 오리니.

 

 

 

                               화림동 월연암에서 남명의 시에 차운함

                                                            詩/갈천

                                  물은 흘러 천 구비를 도는데

                                  마음 아는 벗과 앉아 名利(명리)를 잊었구나.

                                 本性(본성)을 궁구하여 채 마치지 못하고,

                                 날 저물어 쓸쓸히 돌아가네.

 

 

이 시기쯤 退溪(퇴계) 李滉(이황)(1501~1570)선생과에 얽힌 일화도 있다.

두 분은 서로 만난 적이 없어도 명성으로 알고는 있는 사이였다.

이른 봄날(1543년?)에 안동의 퇴계선생은 시간을 내어 경상남도 쪽으로 여행을 왔다. 지리산 시천 덕산서당의 남명선생을 만나고, 함양을 거쳐 오면서 처외가마을 마리면 영승에서 유숙을 했다. 다음날 수승대에서 갈천선생과 요수선생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임금이 부른다는 전갈에, 아래와 같은 시 한편만을 남기고   황급히 돌아가게 되었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골짜기에는 봄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 구려

                            뒷날 한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라

                                                                                     -퇴계_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된 미안함에, 수승대의 본래 이름인 愁送臺(수송대)가 아름다운 경치와 걸맞지 않으니 搜勝臺(수승대)라고 바꾸는 것이 좋겠다면서 남긴 선물인데, 이에 樂水(요수)선생은 아래와 같은 고마움을 표하는 화답시를 짓고 암구대 댓바위 면에 搜勝臺(수승대)란 글자를 새겼다.

일생 후학 양성에 힘썼던 황산의 樂水(요수) 愼權(신권(1501~1573))선생은 갈천의 부친 석청공의 제자이며 동시에 갈천의 매부이기도 하다.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세속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요수-

 

 

 갈천도 아래와 같은 답시를 남겼는데, 근심을 보낸다는 愁送(수송)의 뜻을 떠나는 봄과 떠나는 길손을 보내는 여유로운 처사의 마음으로 표현했다.

 

 

                             꽃은 강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한데

                             유람하는 이들이 분주히 오가는구나

                             봄날은 가려하고 길손도 떠나려하니

                             봄날을 보내는 시름만이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시름도 있네

                                                                                -갈천-

 

 

 

퇴계는 이른 봄날에 시를 지으면서 뒷날 술동이를 안고 가겠다했고, 요수는 안고 온 술동이를 앞에 두고 서로의 근심을 붓으로 묻게 될 날을 기대한다는 것이고, 갈천은 무르익은 봄날 꽃도 가득하고 익은 술도 가득하건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사람들이 시름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어떻던, 댓바위 옆 꽃 그늘에서, 술동이 비워가며 시 문답을 나누는 세분의 그림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퇴계도 벼슬 욕심은 별로 없었다.

명종조에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등을 역임했고,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다가 선조조에 대제학과 지경연을 중임했다.

훗날, 퇴계선생은 장남에게 남기는 유언으로, 자신의 비명을 ‘처사퇴계지묘’라 하라셨다.

 

고향의 초야에 묻혀서 自怡堂(자이당)을 지키고 강학과 글 읽기를 즐기는 처사로서의 생활에 지족하던 선생은, 1553년(명종8)에 성균관의 공천에 의해 社稷署叅奉(사직서참봉)에 제수한다는 命(명)을 받게 된다.

연로하신 부친의 마지막 간곡한 권고까지 받으니 어찌 따르지를 않겠는가. 비록 하급말직이지만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관직에 나아가긴 했는데, 애초부터 관직에 크게 뜻이 없던 선생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쇠한 부친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이내 봉직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해 버린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老萊子(노래자)가 따로 있던가. 지극정성을 다해 노부를 봉양하나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 애석하게도 부친께서 돌아가시니(1561년 명종16) 선생형제의 비통한 통곡은 주변사람들까지 울렸다.

‘주자가례’의 도리를 다하여 장사를 치르고,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의 侍墓(시묘)살이를 하게 되니, 갈천과 첨모당 형제의 효행은 소문을 타고 안음현감을 통하고 다시 경상도 관찰사를 통한 보고서가 임금님까지 감동시키고, 어명에 따라 큰상과 함께 旌門(정문)이 내려졌던 것이다.

이 때 이미 선생의 연세도 65세였다.

 

安陰(안음)의 前참봉 林薰(임훈) [품성이 수수하고 후덕하며 학술이 정밀하고 박학하여 전에 공천으로 참봉의 직을 받았으나, 늙은 부친 때문에 곧 사직하고 돌아갔다. 집에 있으면서 부친 봉양에 마음을 다하였고 부친을 기쁘게 함에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부친상을 당했을 때 나이가 이미 60세를 넘었으나 執喪(집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훈의 아우 林芸(임운) [효성과 우애가 도타워서 평상시의 정성스러운 봉양과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형인 薰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들에게 旌門을 命하였다. -明宗實錄 권30 19년 윤2월 乙亥條-

 

 

 

1566년(명종21)에는 초야에 묻힌 六行(육행)(여섯 가지의 모범행실) 을 겸비한 인물들을 찾아 천거하라는 임금의 전교가 있어, 六賢(육현)가운데 한 분으로 발탁된 선생께서도 敍用(서용)되는데, 당시의 명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이조에서 아뢰었다.“생원과 진사 중에서 육조(六條)를 구비한 사람을 해조(該曹)가 4대신과 의논하여 4~5인을 뽑아 등용하여 권면하라는 전교가 전일에 있었습니다. 학생 이항, ,... 전참봉 성운, ..... 전별좌 한수, ... 전참봉 남언경, ....

前참봉 임훈[천품이 순수하고 후덕하며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공천에 의해 참봉에 제수되었다. 부친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출사하였다가 해를 넘겨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이 60세가 넘었으나 居喪(거상)함에 예를 준수하였고 시묘하는 3년 동안 한 번도 여막에서 나가는 일이 없었으며, 상도에 벗어난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고 복종하였으며, 헐뜯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우 임운(林芸)도 孝友(효우)와 操行(조행)이 그의 형과 다름이 없었다. 임훈은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妻子를 항상 그의 아우 임운에게 맡겼다. 임운은 형을 위해 가산을 잘 경리하여 굶주림과 궁핍함을 면하게 하였다. 安陰이 그들의 고향이다.]

(........) -명종실록 권33,[21年6月 庚辰條-

 

 

명종은 천거된 六賢(육현) 분들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 임금이었다. 언양현감으로 제수된 선생은 1566년 9월에 御命(어명)을 받아 입궐하고 편전에서 임금을 알현하여, 治亂(치란), 世道(세도)의 청탁, 治國(치국)의 도리, 學文(학문)하는 방법, 嘉言(가언), 善政(선정) 등의 질문에 답하였다.-실록 권33 9월 기해편-

 

부름에 응하여 나라를 위해 봉사함이 백성 되고 신하된 도리일터,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에 선생께서는 임금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충성으로 보답한다.

임지에 부임한 선생은 민생구제를 위한 政事(정사)를 우선하여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폐단과 각종악습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憂國愛民(우국애민)의 충정을 발휘하여 [언양현의 폐단을 진술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언양현이 처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해결방안과 대책마련을 진언하는 한편, 예지로서 어진 임금이 되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임금께서도 선생의 이런 충심을 헤아려 비답을 내리고 치하하셨는데, 아! 1567년 6월에 임금께서 승하하시니, 선생께서도 언양 현감職(직)을 하직하였다.

 

새로이 등극한 젊은 임금 선조께서도 재야의 여러 賢人(현인)들을 중용하고 諫言(간언) 듣기를 원하시어, 조식과 성운을 부르는 전교를 내리고 낙향한 이황에게도 작위를 주어 불러올렸다. 갈천 역시 이듬해 군자감주부에 임명되는 부름을 받으나 사양했다가, 1570년 (선조3년)에 비안현감을 제수 받고 거듭 사양하지 못하니 경복궁 사정전에서 임금을 알현하고, 나라의 원로 신하로서 21세의 젊은 왕에게, 주변에 퇴계 이황 같은 현인들을 항상 가까이 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라고 진언하였다.

임지에 부임한 선생은 제도적 폐단을 개선하고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인재 발굴과 지방 교육의 진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향교의 행사 석전제는 성의를 다해 직접 주관했으며, 지역의 선비들을 예의로서 우대하였다.

비안현감으로 부임한지 2년 되는 해에(1572 宣祖5) 선생에게는 안타까운 비보가 연속 이어지는데, 2월에 막역한 벗 南冥(남명)선생과, 사랑하는 부인 兪氏(유씨)의 부음을, 8월에는 아우 첨모당의 부음을 듣게 되는 것이다.

아우 첨모당선생은, 한양에서 관직생활 중 병고로 56세에 순직하였는데, 평소 가산을 돌보지 않는 큰형님 갈천선생네의 곤궁한 살림과, 일찍 세상을 버린 둘째형님 도계선생의 식솔들을 보살피고 돌보았으며, 갈천선생의 서당건립에도 적극 지원하여오던 중이었지만, 끝내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기에 슬픔이 더욱 컸다.

그 해 겨울 선생께서는, 관직을 물리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해(1573,선조6) 知禮(지례)현감, 宗廟署令(종묘서령), 정4품의 奉正大夫(봉정대부), 정3품의 掌樂院正(장악원정)에 제수한다는 임금의 명이 연이어 내려오나 모두 사양하다가, 10월에 光州牧使(광주목사)를 제수 받고 나이 많음을 이유로 또 사양하니, 불허한다는 임금의 전지가 있어 대궐에 나가 알현하고 임지에 부임하였다.

전임 현감재직 때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政事(정사)를 펴는 광주목사 시절의 선생을 가리켜 전라관찰사 박민헌의 임금께 올리는 서장에는 ....광주목사 임훈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또한 결백하여 백성들이 그의 인품이 고결하다고 지목하면서 다만 오래 유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고 있으며......라고 치적하고 있다.

산에서 나고 산에서 살아 유독 산을 좋아하신 선생께서는 부임한 이듬해(1574선조7)에 광주의 진산 서석산(무등산의 옛 이름)을 올라 주변경치를 감상하고, 하산 길에 소쇄원을 들러서 식영정과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에 취하신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때 동행했던 광주의 지역명사이며 훗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고제 고경명선생(1533~1592)은 遊瑞石錄(유서석록)이란 서석산의 기행문을 남겼다. 최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의 최초 등산기란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글이기에, ‘월간 산’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서 몇 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특집 무등산 국립공원 승격! | 유서석록(遊瑞石錄)] “사흘만 머물면 道를 깨치는 山”

                         조선 중기 문신·의병장 고경명이 광주목사 임훈과 5일간 등산한 한문 기행문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은 자는 이순,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이다. 그의 호를 따서 유서석록을 <高霽峰遊瑞石錄(고제봉유서석록)>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종 28년 광주의 압보촌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유서석록은 그의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년, 1574) 4월 20일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초청으로 24일까지 5일간에 걸쳐 무등산(옛 지명 서석산)에 올라 지은 기행문이다. 그는 당시 날짜별로 무등산 곳곳을 등산하고 방문한 기록을 한문으로 상세하게 남겼다.

 

고경명·임훈 등과 함께 당시 동행한 사람으로는 신형·이억인·김성원·정용·박천·이정·안극지 등이었다. 산행 코스는 4월 20일 취백루~증심사. 21일 사인암~증각사~중령~냉천정~입석대~불사의사~염불암~덕산너덜~지공너덜. 22일 상원등~정상삼봉~서석대~삼일암·금탑사~은적사~석문사·금석사·대자사~규봉암~광석대~문수암~풍혈대·장추대~은신대. 23일 영신골~장불천~창랑천~적벽~소쇄원~식영정~환벽당.

 

 

4월 20일(갑자) 맑음갑술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무등산)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기다리기로 했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 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산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청에 따라 낭풍과 현포 위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흥이 나서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며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치에 이른 것을 알게 됐다.

(......)

4월 23일 맑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산골짜기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고르게 퍼져 줄을 그어놓은 것 같고, 그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만경창파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같았다. 그 뒤로는 아침 햇살을 받은 구름이 붉은 빛깔로 물들어 바람 따라 형형색색의 온갖 모양을 이루니 참으로 절묘한 광경이다. 한퇴지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이 때때로 평평하게 어렸네’하는 구절도 이 기묘한 절경을 다 표현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임 선생이 머리에 복건을 쓰고 처마 앞에 나와 앉으며, 이 뛰어난 경치를 찬탄하는 4언절구 한 수를 읊으신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중천에 뜨고 구름도 차츰 흩어져서 날씨가 활짝 개니 천지가 개벽된 것 같은 참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선생의 말씀에 따라 광석대로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이에 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 한 잔씩을 큰 잔으로 내려 마시게 했다.

 

4월 24일 맑음아침에 창평 현령 이효당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一元 李萬仁)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했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의 영봉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었다.

 

이상으로 서석 탐승의 대강을 적어 그 경과와 전말을 끝맺을까 한다. 임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6개 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 없이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 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여옥(汝玉, 李偵)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 7년(1574)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

                                                                                                                                   -이상 월간 산에서 인용-

 

선생은 광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생활을 끝내고, 고향에서 한가히 여생을 보내시는데 인근 고을뿐만 아니라 조정과 임금으로부터도 극진한 국가원로의 예우를 받게 된다. 평생을 청백리로 일관해온 선생의 살림은 여전히 궁핍하니 사정을 전해들은 임금께서 특별히 양식을 하사하시고, 선생께서는 사은의 인사말씀과 함께 국정운영을 위한 진언을 올리기를 두어 차례 오고가니, 임금께서는 품계와 관직을 장악원정, 통정대부 당상관, 장예원 판결사, 등으로 격상시켰다.

이 무렵 선생은, 정유명, 정유문, 성팽년, 등의 문인들과 함께 정여창선생의 사당을 건립하고 祠堂記(사당기)를 쓰시기도 했다.

 

갑신년(1584 선조17) 정월,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한 임금께서 國醫(국의)를 통해 약을 하사하셨으나 애석하게도 85세를 일기로 사랑방에서 서거하시고 난 후에야 도착하였다. 워낙 가난한 집안 형편인지라 임금의 특별 명에 의한 부의에 의지하고, 원근각지에서 답지한 조문과 부의금을 보태어 염빈의 예를 치루니, 집 북쪽 선영에 남향으로 안택해 모시었다.

선생께서 가신지 2년 후(1586丙戌,宣祖19), 영남의 유림들은 아우 첨모당과 함께 용문서원에 배향해 모시고, 선생의 높은 학덕과 고결한 선비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이어 나라에서는 이조판서에(1861,辛酉,哲宗12)추증하고 孝簡公(효간공)의 시호를(1871,辛未,高宗8) 내렸다.

 

 

 

 

 

 

 

 

 

 

 

 

 

 

 

 

                                                                                                                         갈계리 은진임씨 대종가. 첨모당의 서간소루와 담을 맞대고 있다.

 

 

                                                                                                                                                                    孝簡公(효간공) 갈천 임훈선생

 

 

 

 

 

 

 

우리 선조 갈천선생 할아버지는 성리학을 이념삼은 500년史 朝鮮(조선)에서도 으뜸선비였습니다. 선생의 효행은 모든이들의 사표가 되어 孝簡公(효간공)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이는 동방의 예의지국, 그 중에서도 충효지절의 고장 영남이라. 실로 가문의 영광이요 고장의 자랑입니다.

선생께서 서거하시고 8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을 때에는, 갈천과 남명의 맥을 잇는 영남 유림들이 의병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물질만능에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자랑스러운 전통은 위협받고 국적불명의 문화가 범람합니다.

생각이 짧은 사람은 외래문화는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쉽게 따르면서 정작 소중한 우리의 전통과 문화는 도외시 합니다.

외국의 역사에는 해박하면서 우리역사는 모르고, 외국의 인물들과 계보는 줄줄 외면서 우리나라의 위인과 조상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낡고 고루한 관습은 버리거나 개선해야겠습니다만, 빛나는 문화와 자랑스러운 유산은 지키고 계승해야겠습니다.

 

우리형제의 큰형님이신 둔마형님께서는 근간 문중 일에 매우 열심이십니다.

3년 전에는 쇠락한 용광재를 重修(중수)하는 큰일을  추진해 내더니, 갈천선생의 영정을 봉정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내는 것입니다.

그 일이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까. 선생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위상에 걸 맞는 그림을 위해서는, 중지를 모으고 고증을 하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쉽지 않은 역사입니다.

우리는 종종 안타까운 일을 봅니다.

소중한 유산을 복원하거나 중창한다는 것이 오히려 원형을 망친다든가, 신도비를 세웠는데 웅장한 비석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위압감만 주고, 새긴 글씨가 격에 맞지 않고, 호화롭게 치장한 조형물이 오히려 조악한 경우를 목도할 때입니다.

다행히 효림형님께서 큰형님의 뜻을 따라 함께 하니, 왕조실록에 실린 사가들의 표현을 찾고, 문헌들을 참고하고, 평소 친교가 두터운 화백 유근애교수의 필력으로, 근 2년여의 공력 끝에 품격에 손색 없을 할아버지의 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출가 사문의 길을 걷고는 있지만 갈천선생 할아버지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효림형님은, 차제에, 사당에 모셔지기만 한 선생이 아니라 선생의 얼을 기리고 후손들과 더욱 친숙해지기 위함을 고민하는 모양입니다.

 

유독 칡이 많기도 합니다만, 葛川(갈천), 葛溪(갈계), 갈밭만당, 동네이름은 葛溪里(갈계리)입니다.

후손, 후학, 만세만대가 칡넝쿨처럼 어울렁더울렁 어울려 살라는 깊은 의미를 깨우침에 졸글을 쓸 용기를 얻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유적들을 사진에 담아서, 해마다 무료로 배포해 주신 거실에 걸린 달력을 보면서,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문중 화합에 애쓰시는 은진임씨 宜寧公派(의령공파) 淸林會(청림회)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큰 가르침을 주시는 임기술 선생님을 비롯한 문중 원로 어르신들에게 큰절을 올립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시는 14대 종손 임영익님, 모친 13대 종부님께 감사드립니다.

 

 

 

                                                                               癸巳年  初春, 13代孫 林鐘範 拜

 

 

 

 

 

 

 

 

 

출처 : 북상초등학교 총 동문회
글쓴이 : 송악(임종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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