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전통에 사락(四樂)이라 하여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네가지를 들고 있다.
농상어초(農桑漁樵) 즉 농사짓고, 누에치고, 물고기 잡고, 땔나무를 하는 일이다.
지게를 연상하니 50년 세월을 건너 뛰어 아버지가 떠오른다.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오시는 초부(樵夫) 한 분이 아련히 내게로 오신다.
아버지가 지게에 한 가득 짊어진 깔비(솔가리의 경상도 방언, 소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잎) 한 짐은
가장의 도리이자 정짓간의 어머니를 위한 애정에 표시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부엌 개량을 하기 이전까지는 불을 때서 취사를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주로 삭다리(삭정이, 소나무 마른 가지)를 이용했다.
아궁이에 척척 삭다리를 걸쳐놓고 그 밑에 깔비 한 줌만 있으면 쉽게 불이 붙는 것이다.
내가 지금 추억하는 것은 지게에 실린 그 깔비짐의 멋스러움이다.
바늘처럼 생긴 소나무 마른 잎들을 까꾸리(갈퀴의 방언)로 긁어모아서
지게에 동이는 기술을 어린 나는 신기해 하고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어지간히 숙달된 경험과 기술이 없이
깔비를 바지게도 아닌 맨 지게에 짊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게를 작대기를 받쳐 세운 후 청솔가지를 쪄서(잘라서의 방언)
지게의 두 팔 위와 등이 닿는 곳에 척척 걸친 후에 깔비를 솜씨 있게 얽동여서
두부 잘라놓은 것처럼 멋을 내서 실었던 것이다.
왜정 시대 1923년생인 아버지에게 지게는 그 등에 지워진 멍에였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운명의 족쇄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 앞에 무슨 뾰죽한 수단도, 대안도 없었던 것이다.
하기사(하기야의 방언) 중고 시절 모교의 이사장은 지게를 팽개친 가출을
출세의 첫걸음이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분가할 때 논 두 마지기를 받아서 나온 새 신랑에게 지게는 농사의 가장 필수적인 생산 수단이요, 운반 수단이었다.
그 지게를 지고 좁은 논길, 산돼지처럼 산 속을 헤매며 일용할 양식을 구했던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청년 시절에 큰집을 신축한다고 문중 산에서 소나무를 짊어지고 왔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중간에 지게 쉼터가 마땅치 않아서 5킬로 미터를 쉬지 않고 와서
나무를 부릴 때 (내려 놓을 때) 나무 게다짝이 짝 갈라지더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돼지 마구 한 켠에 마련된 통시(변소의 방언)에서 용변을 보아야 했다.
통시는 배설물을 처리하는 동시에 거름의 생산처였던 것이다.
요즘처럼 좋은 비료가 없는 시대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돼지는 인분을 섭취하는 가축이자 거름을 생산하는 부지런한 인부였다.
“우리 집 돼지는 잠시도 쉬지 않는 활동가” 라며
인분을 쩝쩝 거리며 받아먹던 돼지를 아버지는 늘 칭찬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가끔 분뇨 냄새가 났다.
밭에 오줌을 내기 위해 오줌 장군을 지게에 짊어지다 보니까 절은 냄새가 났던 것이다.
오줌을 내던 날 나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너 거들을 위해 애 쓰는지 봐야 하는 기라.”
“그라고 너도 이런 일을 한번은 해봐야 배우는 기 있는 기라.”
결혼 후 십년 만인 서른 살에 첫 아들인 나를 낳은 아버지는 나에게 일체의 농사일을 시키지 않았었다.
그런 아버지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밭에서 인내를 배우라며 훈육은 땀내음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체험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평을 터뜨리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매우 엄격했던 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얻어맞거나 쫒겨나기 예사였다.
아버지의 지게는 때로는 긍지와 명예를 보상 받기도 했다.
60년대 이후 재건 사업과 생산 증대를 위한 정부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는가 하면
다수확 농민이란 명예를 좋아했다.
면에서 주관하는 농산물 품평회에서 일등 하는 것도 큰 낙이었다.
아버지는 늘상 여당 편이요, 정부 시책의 협조자요, 대통령의 충직한 시민이었다.
온갖 표창장, 감사장, 상장, 당원증이 수두룩하게 담긴 함이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벌겋게 찍힌 관인 옆에는 대통령, 민주공화당 총재, 도지사, 국회의원, 군수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게는 64세에 아버지를 풀어 주었다.
뇌졸중으로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두신 아버지였다.
30년이 흐르고 지금 내가 딱 그 나이가 되어 아버지가 한없이 그립다.
아버지의 멍에는 지게가 아니라 오로지 자식들이었던 것을.......
아버지를 짓누르고 한숨짓게 한 십자가는 바로 나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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