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군님을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세월을 되돌아본답니다.
낭군님의 저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 그리고 가정을 수호하려는 억척같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리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한 여인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에 숨겨진 회포가 어찌 없겠습니까?
제 임무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어찌 속내를 다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야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솔직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낭군님께서는 제가 늘 행복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때로는 즐겁고 기쁜 일이 어지 없었겠습니까만 제 웃음에 드리운 그늘,
제 순종의 미덕에 드리운 체념을 읽고 살펴서 보셨습니까?
저는 불완전한 운명에서 신음하는 인간, 특히 여성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계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상제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 것이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야속한 풍문에 억울한 적도 많았지요.
상제님의 눈을 피해 인간계로 소풍을 나온 일탈로 치부하심은 억울한 오해랍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철저하게 계획된 신비에 가리어진 드라마랍니다.
사실 선녀탕에서 목욕을 하던 제 옷을 감추었을 때 제 당황스러움과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답니다.
선녀로서의 죽음이었지요.
인간적인 기준으로 화를 내고 따질 수도 있었지요.
착하다고 하시는 분이 이렇게 무모하고 도발적이며 위선자인 줄 몰랐어요.
옷을 감추어 약취 유인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범죄인 줄 모르십니까?
게다가 벌거벗은 몸을 훔쳐본 행위는 얼마나 졸렬한 성범죄인 줄 몰라서 했다는 말씀입니까?
아녀자 유괴범도 그 죄가 큰 법인데 하늘의 시녀를 강탈하는
죄값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생각이나 해 보신 것입니까?
게다가 이 유인 약취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부장제의 오랜 관행이 보인답니다.
마치 안개처럼 드리운 악습이 아비투스가 된 고질적인 병폐가 아닌가요?
아무리 가족을 위한 사랑이란 이름도 한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겠어요?
성경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제 아무리 정당하고 공익적인 목표라고 하더라도
결코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제님의 뜻을 알아차린 뒤 낭군님의 구애 행위로 받아들인 것이랍니다.
제 얼굴이 붉어집니다만 짜릿한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했던 체험이었지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 사이의 이야기를 동화가 아닌 멜로 영화로 찍는다면 크게 흥행할지도 모르겠어요.
선녀탕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오는데 전라(全裸)로 목욕을 하는 장면은 얼마나 선정적인가요?
그런데 전라의 여체는 선정을 넘어서는 한층 더 고결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기도 해요.
새로운 탄생의 상징입니다.
상제님은 모든 생명을 탄생 시킬 때는 늘 벌거벗긴 채 보낸답니다.
그런 상태는 가장 순수한 인간의 죄 없는 상태인 것이지요.
설령 죄가 있더라도 깨끗이 씻은 후에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랍니다.
낭군님!
낭군님과의 인연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승천하는 이 길은 한편으로는 슬픈 이별이지만 아름다운 이별로 승화 되었으면 좋겠어요.
부디 눈물을 거두시고 제가 본연의 위치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축복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하늘에서 재회하여 천상복락을 누릴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옥황상제님 곁에서 그대를 지켜볼 것입니다.
때로는 별빛이 되어, 바람이 되어, 한 송이의 꽃에 제 마음이 담길 것입니다.
언젠가 내려 올 희망의 동아줄을 잡으시고 저를 따라 승천하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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