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방 담화

손의 현상학

손수레에 가득한 토란대 껍질을 며칠동안에 벗기고 햇볕에 말린다

이 일은 노동 가치가 보잘 것 없는데다 끈기를 요구하는 귀찮은 일로 여기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즐거운 일로 변한다

토란대 껍질을 벗기며 손이 검붉게 물들었다
처음에는 장갑을 끼고 일을 했지만 이제는 맨 손으로 한다
맨 손이라야 껍질을 벗기는 미세한 감촉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며 일상의 소박한 자연적인 태도를 취한다
토란은 어떻게 재배하는지, 토란대는 어떤 음식의 재료로 좋은지, 어떤 영양가가 있는지, 시장 가격이 어떤지, 어떻게 까는 것이 능률적인지 누구에게 나누어 줄 것인지 등에 대해 소박한 관심을 가지고 대한다

이런 자연적인 태도에서 질적인 변화를 해보면 어떨까?
토란을 지극한 공경과 사랑으로 대하며 격물치지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밭에서 자라는 미적 건축물로 상상하거나 물의 요정으로 섬기며 매일매일 물의 공양을 바칠 수는 없을까?

토란 껍질을 벗기는 사태 자체로 몰입해 보면 이 단순한 일에 신령스런 사유가 끼어들기도 한다
토란의 체액이 내 손을 물들이는 일이 내 애정어린 호기심을 작동 시킨다
이럴 때 나는 천상 어린아이와 같다
제가 하는 일에 매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놀이에 빠진 어린이다

요즘 현상학에 관심이 많아져서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슬쩍 맛본다
그가 내 물든 손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 채 한 마디 할 것 같다
「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사랑방 담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본주의의 좀비  (0) 2021.11.03
플랭크 간이 테스트  (0) 2021.10.15
계곡 산책  (0) 2021.09.30
소리꾼 왕기석  (0) 2021.09.19
바둑을 관전하며  (0)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