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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담화

어느 희한한 수퍼의 주인

외가의 한 누님 이야기다
서른 살 쯤에 홀로 되어 삼남매를 기르느라 궁핍한 살림을 탓하거나 서러워할 겨를조차 없었던 분이다
지금은 70대 중후반인데 남부럽지 않을만큼 자식들을 키워서 독립 시키고 심심풀이 겸해서 운영하는  00수퍼 주인이기도 하다
말이 수퍼지 예전의 점빵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데 담배, 주류, 과자류 조금이 선반에 있을 뿐이다

언젠가 누님의 친동생이 고향으로 귀향을 하고 온 김에 고종 동생인 우리 집을 방문했었는데 전화가 왔던 일이 떠오른다
주인도 없는 가게에 단골 손님이 술을 한 잔 하면서 누님이 어디 갔는지 언제 오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누님의 가게는 주인 없이도 열려있고 단골 손님들이 담배도 팔고 자기들이 술을 마시고 돈을 놔두고 가는 열린 가게인 것이다
문을 닫으면 단골들이 불편할까봐 외출을 해도 열어 둔다고 한다
혹시 좀도둑이 없느냐 물으니 가져갈 것도 별로 없다며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버티느라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빠듯이 몸을 일으키면서도 이 수퍼의 문은 일찍부터 열리고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열댓 명의 단골 손님은 줄어들지를 않는단다
말수도 적은데다 다듬어서 말을 할 줄도 모르는 누님이지만 격의 없는 관계에서 신뢰와 존중과 진심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수퍼지만 여기는 이윤을 올리는 시장이 아니다
고객과 이웃과 친구의 경계가 부질없는 구분이다
까짓 돈 몇 푼 더 벌어봤자 그게 대수냐는 희한한 점빵의 주인이다

손님들과 허물 없이 지내다 보니 격의없는 농담을 하기도 한단다
또래가 비슷한 어떤 노인 한 사람은 누님을 여보라고 부르며 농담을 해도 빙긋이 웃어준단다
"내가 예쁘기를 하나 젊기를 하나, 그 말이 근본이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손님은 오만원권 한 장으로 가게에 들러는 사람들의 술값을 모두 대주기도 한단다

누님은 라면을 삶아 주기도 하고 삼겹살이나 돼지고기 찌개를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돈을 주면 받고 안주면 안받는다고 한다
손님의 주문이 없어도 무슨 먹거리가 있으면 안주감으로 내놓기도 한단다
이곳은 말이 수퍼지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인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고객이자 이 사랑방의 손님인 것이다
서로가 선의와 믿음으로 출입을 하고, 가게의 고객이 주인 노릇을 하고 , 그래서 문이 닫히지 않는 곳이라 공동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런 누님이 요즘 세상의 기인이나 괴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기인을 소개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소개될만 하지 않은가? 그 단골들도 곧잘 화제로 삼는단다

누님이 어떨 때는 보살로 여겨지기도 한다 각박하고 깍정이들이 사는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한 보살님이 변신을 하여 수퍼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일까?

오늘 점심을 내가 대접할 요량으로 외사촌 셋을 모시고 제법 그럴싸한 음식점에 갔는데 이 보살님이 식사 중간에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
아뿔싸 새치기를 하여 거액을 지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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