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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당의 문인화방

외현 장세훈 님의 작품 세계

飄逸한 진리, 韻과 味의 서예를 펼치다

- 외현 장세훈전을 보고

 

임종현 (경기대학교 외래교수)
 
외현 장세훈.
필자는 이 작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언제인지 심사장에서 한 번 맞닥들인 적이 있었는데 활동하는 협회가 달라서인지 서로 면식이 없던 터라 그냥 지나쳤었다. 그때의 기억이라고는 깡마른 체구에 다소 거친 듯한 걸걸한 목소리, 찌푸리면 성깔 꽤나 있을 듯한 미간 등이 전부다. 그의 작품을 관심 있게 본적이 없었고, 그저 말 많은 시끄러운 작가 중의 한 사람이거니 하고 지나쳤었다.

그런 외현 장세훈 선생이 개인전을 한다고 하여 작가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이 백악미술관을 찾았다. 사실 필자가 기고하는 이 전시평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단지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서만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을 서술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음은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이로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느낀 것은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전시와는 다르게 고지(古紙)를 많이 사용한 듯하였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장지 위에 서사한 것이 많아서 얼른 데스크로 가서 도록을 한 부 얻어 작가의 이력부터 먼저 확인해 보았다. 작가는 경기도미술관에 근무하면서 서예를 독학으로 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미술관에 있기 전에는 박물관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골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고지도 모으게 되었고 모은 종이에 작업을 해 보았다고 한다. 고지에 대한 연유를 알고 난 뒤 생업으로 하는 서예가와는 사뭇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작품을 감상해 나갔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느낀 것은 이 작가는 생각이 참 많은 작가라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쓰거나 오랜 세월동안의 습기로 서사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본 그는 생각을 쓰는 작가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예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자기의 작품을 추켜세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했는지에 더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나에게 설명하려 하는 것이었다. 사실 서예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론 중에 기법적인 것, 즉 집필이나 용필, 용묵(用墨)에 관한 것은 글씨를 처음 접할 때 배우는 것이어서 자기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꿈꾸거나 이미 자신만의 영역을 갖고 있는 작가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조금은 우스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라고 하면 용필과 용묵 같은 것들은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방법들을 찾아낸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유창하거나 표일(飄逸)하거나 강경한 느낌의 작품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서예술의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느낀 점은 이 작가는 자기의 특별한 전형을 두지 않고 있는 작가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자기의 습관적 운필의 태도나, 결구의 형태를 견지하는 데에 비해,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자기의 생각을 이입시키는 데에 더 많은 공력을 쏟아붓다 보니까 작품마다 전부 호흡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다. 얼마 전 똑같은 장소에서 꽤나 필명을 날리고 있는 작가의 전시에서 필자는 2작품 정도 보고는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머지 작품 전부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똑같은 톤으로 그냥 써 내려간 것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외현 장세훈 선생은 한 작품을 쓸 때 선구를 하고 그 선구에 맞게 서체를 정하고, 거기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히기에 모든 정신적인 역량과 손끝의 기량을 한 곳으로 모아 관객들에게 자기의 세계를 호소해내는 능력을 가진 작가인 것이다. 다시 말해 법첩과 스승으로부터 배운 서체를 멋지게 뽐내면서도 자기의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작가인 것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 중에서 행서 작품은 위에서 말한 작가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재미가 넘쳤다. 그의 행서는 이른바 골기와 세(勢)를 숭상하는 지금의 서예계 풍조와는 다르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재적인 형태보다 내재적인 정신을 중요시하면서 형질의 심미효과보다는 ‘운(韻)’과 ‘미(味)’를 내심에서 끌어내는 정감의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감과 개성을 중시하면서 작가의 정취를 자유롭게 펴내는 것은 송나라의 예술창작활동의 조류였던 ‘무의’와 ‘무법’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어떤 작품은 이왕(二王)의 법을 따르는가 싶더니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안노공(顔魯公)의 서법이 주를 이루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손과정과 왕탁이 서로 어우러져 한 몸인 듯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작가의 작가주의적 사상도 사상이지만 얼마나 많은 적공(積功)의 세월이 있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필자의 눈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전서 작품들이었다. 머무름없이 거침없이 쓱쓱 그어버린 시원스런 필획들로 이루어져 넓고 방탕한 듯 하지만 전체적인 울타리는 견고하고 치밀하여 하나도 소홀함이 없었다. 붓을 꺾고 누름이 편안하고 자상해서 구속되어 보이지 않는 표일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도 작가는 행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작품마다 다른 것을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전서라고 하는 것이 상형성이 두드러지고 속서하기에 나빠서 고전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오거나 형태를 조금 변형시키는 것이 대전을 이용한 창작의 대부분인 것을 본다면, 거침없는 필획을 구사하여 고전에서 우러나와 한 번 더 숙성된 대전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분명 주목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또 하나 작가는 이번의 전시에서 글씨인지 그림인지 영역이 분명치 않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전통서예를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왠지 낯선 작품들일 것이다. 한자의 근원적 형태인 상형문자를 이용하여 그림처럼 처리하거나, 심지어는 기원전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시리아의 소반 문양을 형상화한 작품까지 서예가들이 접근하지 않는 곳까지 시선을 보내어 서예의 영역을 확장하려 꿈꾸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작가는 서예라는 울타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가슴 안에는 끓고 있는 열정이 넘치는 듯하였다. 다만 워낙 애주가인 탓인지, 가슴에 넘치는 열정 탓인지 다소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호기가 지나친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물론 일회적인 획의 우연성이 서예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장점이기는 하지만 여타의 서예작품에서 보여준 치밀함이 있어서인지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서외구서(書外求書)’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글씨를 글씨 안에서만 구하면 기교에만 치중하여 결국 격이 높은 글씨를 쓸 수 없고 재주만 보이는 공필(空筆)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양(學養)에 힘써서 주변학문과의 끊임없는 교류로 학문과 정신의 고매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외현 장세훈 선생의 전시는 이러한 측면에서 서단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