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 世 勳
Ⅰ. 서론
서예와 문방구는 인간과 문자의 관계처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문자학적인 측면에서의 문방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인류는 2만2천 년 전 라스코 등 몇몇 동굴 벽에 그림을 남겼으며, 이후 인간이 문자를 사용한 것은 6000여 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수많은 세월동안 선화(線畵), 그림, 기호 등으로 이어진 문자는 차츰 체계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져, 기원전 약 1500년경에 기호화되었고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체제가 완비된 듯하다. 한자는 귀갑에 새겨진 갑골문에 기초한 이후 나무나 섬유 등에 쓰였으며, 종이의 발명으로 서예라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진대에 이르러 서예는 급격한 발전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서예와 함께 등장한 벼루와 먹도 그 역사가 깊으며, 정신문명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문인화가인 우봉 조희룡은 ?벼루란 단지 붓을 적시는 것만이 아니라 먹을 가는 것이다. 먹 갈기를 옥처럼 익힌다면 성(性)을 기를 수 있고 갈아도 닳지 않으니 생(生)을 기를 만하다?고 했다. 또한 먹을 일러 물건에 닿으면 어두워지고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하였으니 이런 생각으로 벼루를 갈고 먹을 쓰는 행위를 그 이상의 공부하는 수양으로 여긴 것이다. 이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벼루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벼루의 역사
일반적으로 벼루를 연(硯)이라 하고 이와 같은 뜻으로 硏․ßj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옥(玉)을 얻어 묵해(墨海)를 다스리고 전문(篆文)을 써서 제홍씨의 연이라 했다고 전하여 오는데, 여기서 묵해가 바로 벼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옻나무 즙을 얇게 깍은 대나무에 썼던 칠서(漆書)라는 것이 전하는데, 이는 그 당시 매우 보편화된 듯 중국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죽간(竹簡)이라 한다. 한나라 때에는 칠연(漆硯)이 성행한 듯한데, 이는 옻나무 즙을 모래와 혼합하여 나무에 벼루 형태로 발라서 만든 것으로 황제가 태자에게 칠연(漆硯)을 하사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추론하면 묵서(墨書) 또한 이 시기에 보편화된 게 아닌가 한다. 1969년 서주의 동한묘에서 도금한 금동연이 들어있는 괴묵연이 출토되었고, 1975년에는 호북 강릉고분에서, 기원전 167년에 죽은 요씨 묘에서 많은 죽간과 돌벼루, 먹, 붓 등이 출토되었다. 벼루는 갈아 쓴 흔적이 남아 있으며 먹은 송연묵으로 1.5cm 정도의 작은 먹이었다. 또 한나라 때 먹을 전문으로 만들었다는 위중장이란 사람도 기록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문방용구 모두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1934년 낙랑 채협총에서 연상과 함께 벼루가 출토된 이래 1924년 석암리 울묘분, 낙랑고분 제9호분 등에서 출토된 자료로 보아 우리나라의 문방용구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경남 의창에서 삼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붓이 출토됨에 따라 우리나라 문자사용의 시점을 기원전 2~3세기경으로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도자기벼루, 발이 셋 달린 벼루 등이 꽤 많이 출토되었고,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전한 벼루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벼루로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양은 원통형이며 높이 8cm, 지름 16.5cm의 것으로 잔과 같은 형태의 밑받침과 능형문을 조각한 몸통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원형의 연마부 주위엔 물집이 있으며, 물집에는 먹이 남아 있어 그 사용 여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에는 벼루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금으로 칠하고 은으로 장식한 벼루집과 벼루에 대한 것으로, ?깊이 간직하면 마음이 텅 비어져 향기만 머금을 것?이라는 말과 ?향기로운 먹을 갈아 후세에 전하면 덕의 향기가 더욱 꽃다울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보아 벼루를 매우 귀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지장과 먹을 만드는 먹장이 있었으며, 특히 종이는 고려지라 하여 중국에서도 널리 애용되던 매우 우수한 것이었다. 이즈음 벼루는 삼국시대 유행했던 도연(陶硯)이 차츰 돌벼루로 변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형식은 삼국시대의 다리가 달린 벼루에서 다리가 없는 풍자(風字)형의 돌에 한쪽의 경사를 높게 한 벼루로 변화하여 사용하기 편리한 실용연으로서의 작은 태사연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鐵, 石, 水晶, 銅, 陶, 骨, 瓦, 塼, 木, 土器 등 여러 가지 재료의 벼루가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아름다운 문양부터 소박한 서민의 냄새가 물씬 나는 투박한 문양까지 실로 다양한 양식의 문양들이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벼루는 실용적인 면에서 글씨를 쓰기 위함과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운 완상용 차원의 역할도 동시에 갖고 있었으며 사대부 등의 이상과 꿈을 함께 했던 장중지보로 여겨지기도 했다.
2. 좋은 벼루의 조건
일찍이 중국 사람들의 벼루에 대한 집착과 애용은 많은 자료를 낳게 했다. 그중에서도 송대의 문학자였던 구양수의 연보와 채양의 연기, 왕순의 연록, 돌에 절을 했다는 미불의 연사 등 송대에만도 벼루에 대한 찬술(撰述)이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실용벼루로서의 좋은 벼루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가지보로 여겼다. 그들의 찬술(撰述)을 대략 살펴보면 당대(唐代)부터 이미 알려진 단계연과 흡주용미연 등 돌의 특질을 아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송대(宋代)가 벼루에 대한 관심이 가장 깊었고 저술도 많은 것으로 보아 이러한 것들이 문학, 예술방면으로 커다란 파급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미불의 서화감식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화작품 또한 대단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돌에 대한 호벽(好癖)이 있어 아름다운 돌을 만나면 옷을 입혀 절하고 장인(丈人)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참으로 특이한 취미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연사(硯史)의 저술과 벼루에 대한 심미안으로 석질에 의한 발묵을 벼루의 제일조건으로 여겼다. 벼루의 석질에 대하여 이르기를 천하의 벼루 중에 발묵하여 오래 사용하여도 잘 마르지 않는 돌은 반드시 약간 연해서 두드리면 소리가 낮게 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면 바닥이 점차 우묵해진다고 하지만 이것이 기준이면서 필요한 석질의 형태라고 했다. 발묵에 대하여는 역시 송대 채양의 말을 들 수 있다. 그는 벼루에 간 먹에 붓을 담가 묻히면 붓의 움직임이 술술 투합하여 부착(付着)하지 않는 것을 발묵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먹의 성질도 좋고 색깔도 아름다워서 글을 쓰는 조건에 가장 알맞다는 말일 것이다. 그 후에 발묵의 의미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보통 잘 갈리고 먹물이 기름이나 옻칠과 같이 빛을 내어 먹색에 광택이 나게 하는 성질을 말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석리(石理)에 의해 자연스런 먹빛의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이미 송대에 이르러 벼루와 먹에 대한 이론이 성행, 정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3. 米∫S의 碩史
대체로 중국인들은 벼루에 대하여 단계연(사진1)을 제일로 치고 다음이 흡주연(사진2) 등을 꼽지만, 미불의 연사를 간략히 서술하여 그 종류와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미불은 연사에서도 벼루에 대한 사람들의 기호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매우 공통성이 있는 공론이라고 하며 자신의 견해를 비치고 있다. 미불은 벼루의 실용성에 대하여 ?옥은 솥이 되지 못한다. 도자기는 기둥이 되지 못한다. 비단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더운 여름에는 좋지 않다. 벼루도 석리(石理)가 발묵(發墨)하는 것을 제일로 하고 색은 이것의 다음이요, 조각은 또 그 다음이요, 문양 또한 아름다워도 실용성을 잃는다?고 했다. 역시 뛰어난 감식가이자 서화가다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연사에 나오는 미불의 말을 더 살펴보자. 광주 방성현 갈선공 암석에 대하여 미불은 ?석리(石理)는 햇빛에 비추어 보면 옥과 같이 아름답고 거울과 같이 광택이 있다. 먹을 갈 때는 징니연(澄泥硯)(사진3)과 같고 미끄럽지 않다. 먹을 다 갈아도 뜨겁게 되지 않으며 거품을 일으키나 이는 아교의 탓이다. 고묵(古墨)에 거품이 일지 않는 것은 아교가 이미 효력을 잃어서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만약 돌이 미끄러워서 오래 갈아도 먹이 늦게 갈리면 먹과 돌 양자가 모두 강해서 열을 낸다. 고로 아교가 거품을 일게 하는 것이다. 돌이 이와 같이 뜨겁게 되지 않고 약간 오래되어 발묵하며 광택을 내는 것이 칠이나 기름과 같이 반들반들함이 있고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오랫동안 써도 무뎌지지 않고 색은 붉은 빛깔로 사랑할 만하며 소리도 평탄하여 운치가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아직 이 돌을 본 바 없으나 대략의 설명만으로도 알 수 있겠다. 또 온주 화엄니사 암석에 대한 설명은 비슷하다. 벼루를 만들 때 보통 이 돌에는 모래만한 흰 점이 있는데 먹을 가는 바닥부분을 피하도록 했다. 흰 점 부분의 성질이 옥과 같은 성질로 단단해서 가공이 어렵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먹을 갈기 쉽고, 두드리면 소리가 평탄하고 울림이 없다. 옛날 왕희지의 벼루를 보았을 때 이 돌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수장하고 있는 옛 벼루(古硯)에는 가끔 이 돌이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서가에게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 중국인들이 최고로 치는 단주암석(端州巖石)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암(巖)에는 하암(下巖), 상암(上巖), 반변암(半∏Ñ巖), 후락암(後樂巖) 4종류가 있다. 전에 단주에 가서 보고 들었기에 상세히 알고 있다?고 했으며, 그 장문의 설명을 간략히 적어보면 ?하암을 제일로 치고 여기에서 돌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굴을 뚫어서 깊이 들어간다. 계절에 상관없이 돌은 모두 물에 잠겨 있다. 벼루를 공물로 헌상할 때에도 물을 제거하며 1개월 정도 걸려서야 돌이 있는 곳에 다다랐으며, 돌은 질이 가늘고 두드리면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난다. 눈은 구욕새의 눈으로 둥글고 푸르며 무리(暈)가 많고 밝아서 옥과 같이 아름답다. 돌이 약한 곳은 점토처럼 소리가 나지 않으며 먹이 갈리지 않는다.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는 돌은 온윤(溫潤)하고 먹이 빠르게 갈리며 뜨겁게 되지 않고 거품도 일지 않는다. 그러나 약간 오래 두면 물이 스며들고 기름과 같은 윤을 낸다. 또 오랫동안 사용해도 바닥이 닳지 않는다고 했으며, 암이 깊은 곳에 있어 인부의 수고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값이 비싸고 채굴하는 만큼의 효과가 적기 때문에 구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매우 귀한 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관(官)의 벼루는 대부분 이것이었다. 상암은 산의 위에 있고 그 성질은 건조하며 자색이 깊다. 석리(石理)는 조밀하고 성질이 단단하며 눈은 황색으로 푸른색의 것은 색이 흐려서 하암에 미치지 못한다. 먹이 잘 갈리는 것이 있고 먹을 거부하는 것이 있다. 잘 갈리는 것은 작은 모래입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나중에는 무디어져 광택을 내고 먹을 거부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일정한 시기에 벼루바닥을 연마해 주어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매년 나라에 공물(貢物)로 헌상한 것이 바로 이 상암이었다.
반변암은 산의 중간에 있다. 석리는 상암과 같으며 색은 대개 청자색으로 검은색에 가깝다. 눈은 알(卵)과 같이 길고 장님의 눈과 같은 것이 있다. 가운데는 흰점이 있고 사안(死眼)인 것은 중심이 흑점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눈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하고 붓을 닳게 한다고 하였다. 후락석은 화분(花盆)이나 도장, 문진 등의 기물을 만든다. 대개 모래가 섞여 있고 눈이 없으며 간혹 석질이 매우 가늘고 연(軟)한 것이 있다. 발묵하였을 때 바닥이 무디어지지 않고 이것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민들은 귀히 여기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흡연무원석(Ò„硯등源石)을 설명하고 있다. 흡주에는 벼루 석동(石洞)이 있으며 종류가 가장 많다고 했다. 붉은 자색계통의 돌에는 하자가 많다. 주민들은 선(線), 맥(脈), 격(隔)의 3종을 병으로 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라문(細羅文)에 별(星) 무늬가 없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대부분 발묵이 좋고 바닥이 무뎌지지 않는다. 다만 보통과 같은 색의 돌로서 기괴한 것을 높이 친다. 적자색의 돌은 무늬가 없고 하품이 적으며 대추나무와 같은 광택이 난다. 이 돌은 먹과 싸워서 서로 침범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면 먹을 간수할 수 없게 된다. 또 어떤 이에게서 한 장의 금사나문연(金沙羅文硯)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문양의 절반은 금, 절반은 검은 돌로 광채는 보통의 것과 달랐다. 대략 천여 장의 벼루를 보았지만 색이 와전(瓦塼)과 같아서 평가가 높지 않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청주 청석이나 도연 등 이십여 종의 벼룻돌에 대한 설명이 있으나 지면상 생략한다. 이어서 벼루의 성품에 대한 것을 간략히 기술하면, 대개 방형의 벼루 중에 발묵하고 오래 써도 무뎌지지 않는 것은 돌이 약간 연하고 두드리면 소리에 낮은 울림이 있다. 세월이 지남과 함께 벼루 바닥이 파인다. 발묵하지 않는 것은 돌이 단단하며 두드리면 울림을 낸다. 일단 사용하게 되면 거울 위에 먹을 가는 것 같이 된다. 본인의 품평은 실제 눈으로 보아 직접 수장하여 사용한 적이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들은 것은 많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전하지 않기로 한다. ?옛날 벼루는 좋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기술했듯이 벼루에 대한 사심 없는 생각을 옮기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끝으로 연사의 말미에는 자신이 보았던 벼루와 수장품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에 고려연(高麗硯)이라는 대목의 문구를 보면 ?고려연은 치밀해서 두드리면 소리가 울리고 발묵하였을 때, 푸른빛에 흰색을 머금었으며 금성(金星)이 있다?라고 호평한 것을 볼 때 우리나라 벼루에 대한 식견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푸른빛에 흰색을 머금은 우리 벼루가 어느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해주석(海州石) 계통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중에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 남포석(사진4)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서유구는 이 글에서 ?남포석은 금사문(金沙文)이 으뜸이고 은사문(銀沙文)이 그 다음이고 화초문(花草文)이 또 그 다음이다. 돌의 질은 경질로 먹물을 빨아들여 엉키게 하지 않으며 적당하고, 돌의 결이 각박하면 먹색이 탁하고 돌의 결이 경질이면 묵색이 맑고 윤기가 있어 아름다운 색을 가진 남포석은 먹과 같다?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으나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 ?좋은 돌은 단계연이나 흡주연과도 바꾸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남포에 있는 성주산에서 나오는 금사나 은사문 벼루는 매우 귀하여 일반인이 완상할 수 있는 기회조차 매우 드문일이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벼루의 산지로 유명하며 좋은 돌이 나오는 곳이 수십곳에 이르지만 지금은 벼루를 만드는 사람이 적어 옛날과 같이 좋은 벼루를 얻기는 힘들다. 지금은 갈 수 없는 평안북도 위원 화초석(사진5)과 자석, 청석은 매우 아름다운 돌이며, 그 밖에 함경북도 종성군의 종성석, 평양의 대동강석 등이 있다. 이남에는 파주의 회청석, 강원도에서 나오는 화석이 깔린 화석연, 평창의 자석과 진천의 회청석, 단양의 자석, 안동의 자석(사진6) 등 많은 곳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벼루를 만드는 사람이 적고 돌의 질과 모양에 따라 품격 높은 벼루를 생산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으며, 대개가 기계로 깎아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4. 벼루의 사용에 대하여
송대의 당적이 지은 흡주연보에 벼루를 만드는 법과 간수하는 법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벼루의 내부와 외부에 납(蠟)을 바른다. 이는 돌에 좋기 때문이며, 돌은 온윤광결(溫潤光潔)해서 가히 사랑할 만하다. 그래도 돌은 손상되지 않으며, 먹이 앙금 져도 달라붙지 않고 닦기에도 편하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처음부터 생강의 즙을 먹을 가는 곳에 발라두면 착묵(着墨)이 좋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방법을 알지 못해 돌의 병든 곳을 그저 묵납만 가지고 덮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먹의 빛을 낼 때도 처음 먹을 갈 때에 조금의 납을 첨가하지 않으면 먹색을 막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3~5번 하면 이점이 없어지게 된다?, 또 ?손의 기름기에 닿으면 반드시 흔적이 된다. 따라서 대부분 납을 사용한다. 이것은 그 염려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벼루는 매일 씻어 그 쌓인 먹물을 깨끗이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먹빛이 영택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예가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마땅히 벼루 사용에 대하여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알아두어야 한다며 지켜야 할 일들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벼루를 만들어 큰 솥에다 수증기로 찐다. 뜨거운 벼루에 봉밀을 칠하면 녹아서 깊이 스며들고 그것이 식을 때까지 계속 문질러서 광택이 나도록 하지만, 요즘은 석유불에 구워서 하기도 하는데 이는 돌에 변화가 생겨 좋지 못한 방법이다. 봉밀을 칠하는 이유는 본래 돌 자체에 광택이 없으므로 밀을 발라 표면에 막을 형성시켜 검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또 벼루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연민 선생의 작품에 세연경이 보이는데 ?대체 벼루는 날마다 씻어야 한다. 만일 씻지 않은 채 2~3일이 지나면 곧 먹빛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또 날마다 씻지 못한다 하더라도 물은 자주 갈아야 한다. 봄이나 여름철에 먹물을 오랫동안 벼루에 두면 아교기운이 어려서 쓸 수 없을 것인바 자주 씻어야 한다. 뜨거운 물이나 헝겊, 종이 등도 좋지 않다. 다만, 연방(連房)과 고탄(枯炭)으로 씻는 것이 좋다. 또 단계에는 세연석이 있으며 반하(半夏)를 쪼개어 씻어도 좋다?고 한 내용은 벼루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다. 다만 요즘 서가들은 벼루에 봉망이 무뎌지거나 상처가 났을 때 미세한 연마용 돌로 물에서 가볍게 갈아주기도 하는데, 연방이나 고탄, 반하 등을 사용해도 좋지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연마석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Ⅲ. 결론
이상과 같이 송대 미불의 연사를 중점으로 벼루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요즘 서가들은 벼루를 아끼기는 하지만, 잘 알지 못하고 그 품격에 대해서 완미할 여유도 없는 듯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먹물을 사용하고 그 빛깔에 대해서도 유행처럼 중국 화선지에 먹물을 흐릿하거나 푸르게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듯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알맞은 벼루와 또 그 벼루에 알맞은 먹의 사용으로 자신의 글씨에 품격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지금은 수출입이 자유로워 중국이나 일본의 문방이 많이 들어오지만 좋은 것을 찾기란 쉽지 않고 또한 먹이나 붓도 삼국이 공히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겠다. 먹은 그을음과 아교의 비율이 중국은 100:120, 일본은 100:60 정도이고 우리는 그 중간에 속해 흔히 중국 먹은 건조해지면 터지기 일쑤다. 붓도 중국은 유필로 어지간한 사람이 쓰면 흐느적거리며, 일본 붓은 호필이 많아 강하지만 우리나라 붓은 먹과 같이 중간이다. 우리의 남포 금사문벼루에 중국 송연을 간다면 간혹 먹에 섞인 이물질로 서걱서걱해서 벼루 바닥에 흠집이 나고 많은 아교 성분으로 인해 붓이 잘 나가지 않게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벼루와 먹의 궁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1. 이가원, 묵선첩, 연문사, 1980 2. 벼루장, 문화재관리국, 1988 3. 권도홍, 벼루, 대원사, 1989 4. 최열, 근대수묵 채색화감상법, 대원사, 1996 5. 中田勇次郞, 文房淸玩四, 二玄社, 1976 6. 書畵 재료의 길잡이, 송지방, 1991 7. 조르주 장 지음, 이종인 옮김, 문자의 역사, 시공사,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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