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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담화

늘 바쁜 친구에게 - 소외되지 않는 능동성에 대하여

 

요즘 늘 바빠. 오늘은......”


한 친구는 늘 자신이 바쁘다면서 묻지도 않은 실제 사례를 일일이 열거한다.


그래. 많이 분주하구나.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일이지.”


라고 의례적인 표현을 하면서도 물음 하나를 나 자신에게 던진다.


 


그런데 바쁜 것이 좋을까?


바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


참으로 존재한다는 것일까?”


 

 

                                                                

 

 

참으로 존재하는 기쁨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는 능동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신념을 에리히 프롬에게서 배운다.


여기서 능동성이란 분주하다는 외면적인 능동성의 의미보다는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내면적 의미를 가리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능동성에는 소외된 능동성과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으로 나누어지며

양자간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소외된 능동성의 경우에는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능동성의 결과를 경험한다.

여기서는 내가 진정으로 선택하고,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외부(직장, 공동체)의 압박이나 지시, 강요, 체면, 습속 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분주하다면 소외된 능동성이다.

 

내적인 압박이나 충동에 의한 소외된 능동성은 강박증 환자에게서 잘 나타난다.

자기 발자국을 세거나 어떤 구절을 되풀이해서 외우는 등의 사례는 일견 능동적인 행동 같지만

정신병리적 차원의, 강요당하는 능동성이다.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은 궁중 화가의 명예와 후한 접대를 거부하고 고단한 현실로 뛰쳐나간다.

강요된 능동성에서는 진정한 그림이 생산될 수 엇다는 독립과 자존의 선언인 것이다.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은 내 자신이 활동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생산적 능동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산이라는 것이 예술가나 과학자들처럼 독창적인 것을

창조하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난초 한 포기를 그저 근성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보는,

이를테면 난초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가꾸는 과정에서

생명을 고양하기 위해 헌신한다면 훌륭한 생산적 능동성이다.


 

 

생산적 능동성을 가진 이들은 접하는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며

자신의 능력을 탄생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 시키고, 의욕이 충만하고 흘러넘치고,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타인과 세계에 참여하고, 무언가를 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