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원생활의 즐거움

만추의 수채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더 이상 생명의 젖이 되지 못하는 비를 맞으며 젖은 잎들이 시큰둥하다.

생명의 젖이 되어 대지를 양육하던 비가 계절이 교차하는 간이역의 이별이 된다.

 

비가 연신 내리는 중에도 산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는다.

불이야! 불! 앞 산에 불이 붙었다.

군데군데 활엽수 잎마다 번지는 불길이 위로 치솟아 오른다.

연기로 자욱한 만추의 산에 소방대는 출동하지 않는다.

 

 

 

 

온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서슬이 퍼렇던 칡 줄기랑 잎들이

서리 폭탄 몇 방을 맞고 풀이 죽은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왕성하고 치열하게 일구었던 분신들마저 버리고 비우는 철칙을 새긴다.

 

이제 자연은 동안거에 들 채비를 하는구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걸자 오가던 발자국들이 덮인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수채화 한 폭이다.

만추의 풍경화는 온통 황과 홍의 두 색이 대세다.

그러나 아직 손길이 닿지 않은 잎 몇몇 가닥만이 푸르다.

그러나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화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한 잎 한 잎 채색을 하다가

이제 붓에 듬뿍 물감을 묻혀 풀어놓기 시작한다.

붓이 수목에 닿기도 전에 몇몇 방울들이 낙엽처럼 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몇 방울이 포르르 낙하한다.

열반에 든 무용수처럼

생과 사를 넘나드는 무용수처럼

천상천하를 넘나드는 무용수처럼

 

 

 

 

 

 

'전원생활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절의 사색  (0) 2015.12.21
천궁이 지천으로 핀 야산  (0) 2015.11.29
가을의 소리(秋聲)  (0) 2015.11.08
유홍초와 사랑  (0) 2015.11.03
감국향을 훔치다  (0)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