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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가난은 내적 부의 전제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가난하면서도 품위 있고 풍요롭게 산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소로, 인도의 간디, 우리의 법정스님은 그런 부류에 속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보여준 분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소유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 구조에 빠질수록 우리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경고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이동풍이다.

이런 분들은 자신의 삶으로서 그런 믿음의 불씨를 지핀 분들이다.

자본주의의 환각에 빠진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들의 공통점인 가난은 내면적인 부를 낳기 위한 한 전제다.

소유 의식은 인간을 제약하고 감금하고 변질 시키는 것임을 꿰뚫어 본

선각자들의 단호한 자기 명령과 자기 쇄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자아 속박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생명과 인간성이라는 본래의 가치를 지키려 했다.


 

가난해서 옷을 백번이나 꿰매 입었다는 백결선생의 방아타령은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생생한 일화라고 하겠다.

외형적인 생활의 조건이 좋지 못해 누더기를 입고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연주하며 위로했다.

이 얼마나 강인하고 차원높은 예술적 승화인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이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는 믿음은 소망스럽지 못한 현실조건을 수용하고

더 나아가 내면적 성장과 창조를 위한 계기로 삼았다.

 

 

내적인 부를 낳는 행위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우리의 능력을 그것에 대응하는 대상을 향해

능동적으로, 소외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름답게 핀 꽃 앞에서 그윽한 향기와 화려한 자태에 취한다.

코로 향기를 맡고, 눈으로 자태를 보는 것이 그 대상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의 실재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원을 소유한 주인이 직접 꽃을 보며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능동적으로 발휘되지 않는 것이며 꽃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느끼는 각 기관이 그 대상을 제 것을 만들 때 진정한 내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서 나타난다.

정원을 소유할 것이 아니라 꽃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열린 마음과 미의식에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

 

백결선생은 거문고의 현을 잡고, 독특한 소리와 조화로 만들어진 타령을 만들어

가족을 위로하고 정신적 만족을 누렸으니 존재하는 삶의 품격과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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