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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증여하는 사회

고향 마을에서는 동창회라든가 면민체육대회와 같은 행사가 있을 때면 이색적이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행사장의 본부석에 세로로 늘어트린 찬조금 기부자의 명단이 바람에 펄럭였었고 지금도 가끔 펄럭이기도 한다.

또 행사장 입구에 전시된 화환에 기부자의 이름을 적어 늘어트린 천은 요즘 일상적인 풍경이다.


참석하는 성원들에게 자발적인 모금을 통하여 참여의식을 제고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체면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중요시해 온 관습의 단면이 드러나는 터라 매우 흥미있게 관찰을 한다.

지역의 유지들은 그 앞에서 기꺼이 지갑을 열어 호탕한 기부를 하고는 한두 번 어깨를 으쓱이며 기분을 낸다.

돌아가서 마누라에게 들을 잔소리는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행사를 마치고 나면 통 큰 기부자의 이름이 두루 회자(膾炙)되고

그럼으로써 그는 유지의 체면치레를 하거나 유지의 반열로 편입되기를 기대한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특정 원주민의 삶과 사회를 인류학적 시선에서 연구한 인물로

원주민들이 증여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모스는 마오리족이 <타옹가>라는 선물과 답례을 주고받으면서 그 중심에는 <하우>라는 물건의 영()이 있다고 한다.

물건의 하우는 증여자 또는 최초의 생산자에게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욕망이 방해를 받으면 물건의 소유자는 병에 걸려 죽고 만다는 것이다.

하우는 도덕적 토대 위에서 경제적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종교적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모스는 토착민의 증여-교환의 사례를 보면서 증여의 범주에는 물건만이 아니라

향연, 의식, 축제, 예의, 군사적 복종, 동산과 부동산 등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를 축적하는 사회다.

그런데 상기한 바와 같은 증여의 사회는 지출을 우선하는 사회다.

찬조금 기부라는 증여는 위신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교환되는 상징적 교환인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교환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존경 받는 이유는 최고의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기부자이기 때문이다.

거의 100조원에 달하는 재산가인데 놀라운 것은 세 자녀에게 천만 달러씩만 남겨주고 모두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결핵, 말라리아 등의 희귀병과 난치병 백신을 개발하는데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며

요즘은 매년 35억 달러씩 기부를 한다니 존경받아 마땅하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바로 증여사회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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