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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즐거움

대숲에서

거창읍에 있는 지인의 대나무 숲에서 일을 도와준다
200평이나 되는 밭을 점령한 대나무들을 제거하는 작업인데 오늘은 주택으로 뻗은 일부 대나무들을 잘라내는 일이다
흙돌담이 있고 대나무가 빼곡히 차 있으니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다 키가 족히 10미터가 넘는 대나무를 자르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속이 비어있어서 수공톱만으로도 자르는 일은 힘들지 않은데 문제는 자른 나무를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키다리 대나무를 잘라 놓아도  대나무를 눕히고 방향을 돌려 하단부를 잡고 끌어내야 하는데 워낙 밀집한 공간이라 난처하다

<공간을 확보하라>
일머리가 알려주는 해결책이다 그러자면 대나무를 몇 등분으로 잘라서 바깥으로 옮기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조금씩 공간이 생겨나니 대나무가 눕게 되고 끌어내기도 쉬워진다

빈 공간이 있으니 일이 쉬워진다 형체도 없는 공간 즉 비어있음이 일의 능률을 높인다
나무를 자르는 톱날도 공간이 없으면 나무를 자르지 못한다
불과 몇 달만에 키를 키우는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있어서 가능하다
튼튼한 벽으로 둘러싼 집은 내부가 비어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

사람의 마음도  비어있어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 이미 가득 차서 빈 공간이 없으면 마음에 담기지 않는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면 이타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고, 탐욕으로 가득 차면 사랑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진다
형체가 있는 사물도 근본적으로는 사멸하는 것이니  색은 공하고 공한 것이 색이라는 불가의 진리도 있다

대숲에서 일을 하다보니 사유의 선물이 품삯보다 값지다
뿌리가 잘린 댓잎이지만 군자의 기품처럼 청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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