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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訥辯(눌변)의 미학

 

젊은 시절에는 화려하고 유창한 말의 유희를 즐겼다.


말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따발총처럼 쏘아대거나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찾아내기 바빴고,


인기에 영합하는 화려한 용어라던가


때로는 외국어,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인텔리를 모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仁이 없었다.


 


 



 


 


TV 방송을 보면 잘 차려입은 말들이 화려한 화장을 하고 향연을 즐긴다.


심지어 말싸움꾼들이 등장해 창과 방패를 번갈아 휘두르며


핏대를 올리며 싸움을 하고 시청자들은 은근히 즐긴다.


 


가변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의 묘책이며


상대의 심리를 궤뚫는 寸鐵殺人의 槍이며


상대를 一擧에 제압하는 秘策이며


듣는 이의 心琴을 울리는 巧言令色의 달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能手能爛(능수능란)하고 千變萬化의 솜씨로 포장된 껍질을 벗겨내 보아라.


 


그 알맹이에도 역시 仁이 없다.


 


 


 



 


 


 


지난 겨울 내내 강을 따라 흘렀었다.


급하고 야위고 수척해진 강의 상류에서


느리고 완만하게 소리없이 흐르는 강의 하류를 향해 흘렀었다.


 


뚝방길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강처럼


고독한 여행을 반복했었다.


 


강과 둘이서 만나 함께 걸었다.


스쳐가는 매서운 바람과 마주치며


비우고 마르는 裸木처럼 걸었다.


 


 


 



 


 


언제부터인지 말이 어눌해진다.


혀가 굳고 입이 얼어 붙는다.


말의 流麗(유려)한 흐름 앞에 불쑥불쑥 나타는 암초에 부딪혀


정신이 멍하고 때론 혼절까지 하는구나.


 


狼狽(낭패)로다.


 



 


 


걸으면서 말을 잃는다.


 


기억의 저장고를 넘나드는 익숙했던 길이 차츰 멀어지고 서툴러지기가 일쑤로구나.


如意棒을 휘두르는 손오공처럼 구강 내 深山幽谷을 自由自在로 넘나들었건만


혀가 어찌 어러는 것인가.


 


술에 취한 듯 뒤틀리고 육중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태업을 일삼듯 하는구나.


 


입술도 위 아래가 숨구멍처럼 자연스레 열리고 닫히며


음성의 조합을 이루어야 하거늘 어찌 꾸어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었는가.


 


 


 



 


 


아쉽고 허무함을 탓할 일이 아니로구나.


訥辯의 미학이 있음이니.....


 


공자는 大辯若訥(참으로 잘하는 말은 어눌한 것처럼 들린다.)이라 하였으니


心機一轉하며 그 의미를 더듬어 볼 일이다.


 


 



 


 


눌변의 미학


 


어눌함의 떠듬거림은 맹인의 지팡이 끝의 두 세번의 더듬댐이다.


세상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예민한 촉각은 次善의 시각이다.


말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는 것이리라.


 


 



 


 


어눌함에는 세상의 험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현자의 신중함이 끈끈히 배어 나온다.


 


山戰水戰을 다겪은 풍부한 경험과 원숙한 지혜는


속단과 유창함을 제일 앞세우지 않으리라.


삶의 진리가 어찌 一刀兩斷의 문제던가.


 


말의 즉각성, 일회성으로 인한 폐해를 얼마나 많이 목격했으리오.


말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을 얼마나 안타까워했으리오.


 



 


 


어눌함은 원숙한 大家의 退行이다.


 


후안 미로나 운보 화백의 말년의 작품을 보면


마치 어린애가 그린 그림처럼 稚拙(치졸)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 방면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마에스트로가 법도며 격식의 제약에서 벗어나


기교의 화려함에서 탈피하여 천진한 아이의 동심을 보여준다.


 


어눌함은 말을 배우는 유아의 웅얼거림, 미분화된 발음,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어휘 나열처럼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동심으로의 퇴행이다.


 


 


 



 


 


어눌함은 深山에 幽居하는 隱者가 선호하는 꾸밈 없는 말투다.


은자는 자연과 사물과 소통하며 근본 이치에 대해 사유한다.


사람들과 세속에 초연하려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라 능숙하지 않다.


 


 



 


 


어눌함은 훌륭한 인격자, 원숙한 현자의 망설임이요, 머뭇거림의 여유다.


말에도 걸음과 마찬가지로 삐침이 있으니 여기에 諧謔(해학)이 담겨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신념으로


다만 최선을 찾기 위한 고심어린 머뭇거림이리라.


 



 


 


또한 어눌함에는 바보의 수줍어 하는, 겸연쩍은 미소가 담겨


상대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한다.


 


허술한 말씨, 떠듬대는 말에


상대에게 품었던 경쟁 심리나 적대감을 풀어버리고


편안하게 대하는 심리적 위안 효과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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