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3.1절 기념식 말미에 만세 삼창을 한바 있었다
누군가의 선창에 이어 복창을 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차게 터져나오기는 커녕
쑥스럽고 우습기만 해서 오히려 불경스런 송구함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
만세를 부를만한 사건에 직접 관여한 것도 아니니
심정적인 환호가 따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의례에 불과한 상투적인 행위가 어색했던 것이다
진정한 만세를 부르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호성을 지른 경험을 소환해 본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의 8강과 4강 진출이 결정되는
골이 터질 때의 폭발적 반응으로서의 만세다
세계적 축구 강국에 대항해서 이기고 싶은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 순간의 격정적 환호성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만세였다
또 하나를 들라면 나는 제대의 순간이다
예비군 복장을 하고 부대 정문을 나서는 벅차오르는 희열의 만세다
26개월의 복무로 억눌린 자유의 스프링이 튀어오르며 하늘을 비상할 듯한 기쁨이었다
3.1 운동은 우리의 직접 경험으로 체화된 것이 아니라
흘러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구체화함으로써
감각적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옴으로써 살아있는 역사로 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유관순!
어리지만 민족애로 무장한 한 소녀가 3.1 운동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한 것은
영화보다 더 아름답고 리얼한 역사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쑥스러워했던 나는 지금 유관순의 당시 행적을 살펴본다
18세 소녀의 잔다르크적 영웅적 기질과 용기에 감동하다가
억압과 고통에 시달리다 지고 만 가녀린 일생에 눈시울이 젖는다
2020년 3.1절은 울먹거리며 만세를 부른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자료 일부 발췌)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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