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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퇴비장을 만들며

퇴비장을 만든다
느닷없이 퇴비장을 만들고 싶은 충동을 부채질한 것은 왕겨다
이전부터 방앗간에서 왕겨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물건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
오늘 친구를 통해서 두 포대를 공짜로 얻게 되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처럼 일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이 일을 하는동안 내내 즐거움이 샘솟듯 한다
한 포에 2천원이 채 안되는 잘 부숙된 농협 퇴비에서 누릴 수 없는 호기심과 기대와 상상의 기쁨이다
그건 타인이 생산한 상품의 결과물이고 이건 내가 생산하는 삶의 과정이다
그건 하나의 공통된 기준으로 매겨지는 것이고 이건 주관적이라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건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한 노동이고 이건 재미와 상상이 깃드는 놀이인 것이다
시장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차이가 무시되기 일쑤다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뒷산에서 부엽토 몇 포대를 긁어서 나르고, 몇 주 전 들깨 기름을 짜고 가져온 깻묵 한 포대를 돌로 빻아 가루로 만들고, 막 가져온 왕겨를 섞고, 물로 골고루 듬뿍 적셔주고 비닐로 덮어준다

오늘 밤부터 이 퇴비장 안에서 신기한 현상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부엽토에서 살던 이름 모를 미생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렇게 살기 좋은 지상 낙원이 있느냐며 증식을 하는데 하도 숫자가 많아 헤아릴 수가 없다 포근하고 먹이가 지천이니 마음껏 뛰고 놀며 천하의 강성한 세력을 만드세
촉촉한 물기는 미생물의 양수라네 들깨 깻묵 가루에는 아직도 고소한 향기 머물고 있는 가루는 대군의 식량으로 충분하다네
우리 미생물 대군들은 저마다 신비로운 무장을 하고 이 땅을 옥토로 만드는 개혁가들이지  
마르고 박하고 뭉친 것을 기름지고 포슬포슬하게 풀어주지 땅에 젖이 흐르게 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헌신과 사랑이 돋아나게 하지

퇴비장이 생겨나니 개똥들이 버려지기는커녕 퇴비장의 소중한 자원이 되었네 음식물 찌꺼기가 퇴비장의 VIP로 승격하게 되었네
뽑힌 풀이며 낙엽도 퇴비장에서 초대를 받아 싱글벙글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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