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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즐거움

무우밭에서

텃밭을 일구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이 생겨 밭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게 된다
8월말, 옥수수를 심었던 자리에서 비닐 멀칭은 그대로 두고 뿌리를 뽑아낸 후에 무우 씨앗을 묻어두었더니 대엿새만에 머리를 밀고나온 무우 싹들이었다
어린 연하디연한 새 순을 탐낸 벌레들이 좋아라며 뜯어먹어 구멍이 송송나버려 뽑아낼까 하다가 농약을 조금 뿌리고 내버려 두었더니 놀랄만한 자구력으로 자라난다
연약한 잎이 자라 소년의 팔이 되더니 청년의 힘줄처럼 억세게 광합성 작용을 하고 가느다란 팔목 사이즈만큼 뿌리가 자라 지상으로 솟아나온다 이제 몇 주 지나면 실한 종아리처럼 굵어지고 단맛을 품을 것이다

두달 만에 장한 생장을 거의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일군 무우 밭을 둘러본다
무우는 서늘한 기운을 좋아하여 시월에 많이 자라는 것을 깨닫고 조력해 준다
모두 다 합쳐보면 30여 개인데 볼 때마다 풍성하고 보람으로 다가온다

한 봉지의 씨앗을 구입하여 씨앗이 누울 자리를 펴고 잘 자라게 돌보게 한 내 손길은 대자연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지만 그 공과를 독점하니 감사를 돌려드려야 한다

채 석달도 안되는 생애지만 씨앗 한 톨의 미미한 시작이 맺는 종결은 풍성하다
처음부터 거둘 때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동반하는 수고와 기쁨이 있었다
내 필요에 의해 즉각적으로 구매하는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대면하며 일군 것이다
비를 맞으며 잎이 생기를 띠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벌레로 상처난 잎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양육의 과정이었다

저 무우가 반찬이 되어 내 몸으로 들어가서 내 몸의 일부가 되고 내 영혼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성스러운 축복이고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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