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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즐거움

손바닥만한 시금치 밭에서

매일 두세 번은 텃밭에 나가는데 내 발걸음을 유인하고 추동하는 힘은 기쁨과 충족감이다
일주일 전에 시금치 한 줌을 뽑아내어 나물 반찬을 하고 빈 자리에 씨앗을 묻어두었다

머리를 내밀었나?
오늘은 무슨 징조를 보이나?
그 호기심은 지난 번과 다른 차이를 찾아내려는 이끌림이다
시공의 장에서 끊임없이 변화 시켜 나가는 식물들의 과정을 관찰하며 나와의 상호작용을 즐긴다

씨앗은 종의 정보를 집적한 신비체다
최소한의 양태로 복잡하고 경이로운 유전자 정보를 압축한 종의 파일이 잠재태로 있다가 적절한 조건에서 실현 시키는 마법의 존재다

묻어놓은 시금치 새까만 씨앗이 변신하여 뾰죽한 초록 정수리를 내밀고 있다
이 작고 연약한 잎사귀가 돋아나는 것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그 사소해 보이는 현상을 깊이 사유하는 것은 일상을 새로움으로 변화 시키고 살찌게 한다

일상에서 당연하고 흔한 장면이라 많은 사람들은 대수롭잖은 일로 여기지만 생각의 차원을 바꾸면 경이롭고 신기한 변화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당연한 현상이라는 선이해나 고정 관념에 물들면 전혀 새롭지도 기뻐할 것도 없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일상적 자연적 태도로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시금치를 심는 시기, 재배방법, 시장가격, 영양소 등에 관심이 많은데 이런 일상적, 자연적 태도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현상에 다가가는 현상학적 환원으로 순수의식에 이를 수 있다는 현상학적 관점을 맛보는 기회가 된다

시금치 한 줌을 뽑아서 뿌리를 다듬고 떡잎을 정리한 후에 씻어 놓는다
시금치가 섭취했던 땅의 지기, 하늘의 천기가 내 몸에 들어가 피와 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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