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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설(雪)날의 사색

온종일 많은 눈이 내린다
이런 설(雪)날은 내 기억에 처음이다
백설은 동화의 나라, 무위의 나라를 연출하는 극적인 효과다
온종일 눈이 내리는 이런 날은 진정한 안식일이다

무위가 연출하는 마법의 풍경들에 홀린 관객이 되어 고요한 관조에 든다
눈이 온종일 연속되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한 번도 동일하지 않다
눈을 잉태한 창공은 눈물을 머금은 동공처럼 촉촉히 젖어 흐릿하다 젖은 하늘은 시적 감수성과 마법사의 신비감으로 가득하다


구름이 차가운 기운과 만나 얼음 알갱이가 되고 저희들끼리 몸을 맞대고 뒤섞인다
신묘한 결합으로 형상을 취하고 색을 얻어 생동한다
눈송이들이 하강하면서 가벼워진만큼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창공을 부유하며 흩날린다
바람과 눈이 교접한다 서로의 신체 사이로 침투하여 제 이름이며 본분을 잊는다 서로가 한 몸인듯 어울려 춤을 춘다

창문 앞에 줄 지어 선 정원수의 정수리며 어깨춤에 눈이 쌓인다
장독이 하얀 중절 모자를 쓰고 소나무 그 날카로운 침엽을 솜이불처럼 감싼 눈은 모정을 품은 시인이고 마법사다
나무가 제 형상을 망각하고 백설의 페스티벌에 동참하며 눈의 품에 안긴다
온 지상의 사물들이 죄다 백설의 춤판에 호응하며 신천지가 펼쳐진다

관조의 세계에 드니 온 세계가 화해하는 나라가 된다
구름, 바람, 눈, 비, 나무, 창공이 함께 더불어 존재하며 옆 자리에 나를 초대한다

백설의 나라는 진실하다 그 진실의 심층적 의미는 여러 사물들이 격에 맞게 어울리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으로 통하던 길이 지워진다
나도 고요해진다
누군가와의 약속도, 몸에 밴 습관도,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망각한다
홀로 고요함으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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