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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낭만적 허무주의자의 독백

 

   

새가 이웃이 되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바람이 쉬었다 가는


이 뜰은 내 존재의 안식처요, 사유의 샘이다.


나는 이 뜰을 소요하면서 영혼을 토닥이는 노래를 듣고


꽃의 개화를 숨죽여 지켜보면서 시끄러운 소리와 복잡다단한 세상을 떠나 있다.


 


 


 



 


 



꽃 한송이를 바라본다.


꽃의 전생의 흔적을 찾으려 마법사의 눈으로 살핀다.


꽃의 등을 토닥이며 동행자의 따스한 미소를 보낸다.


 


 


나는 꽃 한 송이 앞에서 진리를 찾아 나서는 뉴우턴이 된다.


나는 꽃 한 송이의 내력 전체를 샅샅이 알고 있는 제우스가 된다.


드디어 나는 꽃 한송이 앞에서 절대 왕권을 휘두르는 루이 14세가 된다.


 


 


 


 



 


 


나는 무한을 갈구하는 낭만적 허무주의자다.


진리를 갈구하는 낭만주의자들에게 이 세계는


보다 심오하고 본질적인 진리가 감추어진 곳이다.


 


마치 열정적인 기사나 영웅들이 진리의 보물섬을 찾아 나서며


온갖 고난과 시련에 부딪히며 구원과 해방을 찾듯이


낭만주의는 예술이나 예술가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참된 진리를 본다는 것은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꽃 한송이에 대한 대한 객관적 지식과 정보는


한정된 이것에 관한 부분적인 인식일 따름이다.


 


그것은 인식하는 주관과 대립되어 있으며


이것이 아닌 그것과도 대립해 있다.


이런 대립으로 인해 그것은 온전한 인식이 아니다.


 


 

 



 


 


전체는 무한한 것이다 그것은 보여지는 유한한 것이 아니므로 이다.


어떤 것에 의해서도 조건 지워지지 않은


무한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한자가 되어야 한다.


 


이 되어야만 어떤 대립과 모순도 없는


전체로서의 참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전체와 일치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근거가 되어야만 한다.


 


 


 




 


낭만적 허무주의자는 전체로서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지만


인간의 숙명적인 불완전성과 현세적 조건적 제약으로


좌절의 쓴 맛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절대 고독이다.


그것은 이루어질 없는 꿈이며 권태다.


 


 


 




 


키에르케고르의 예언을 되뇌인다.


범신론은 충실하고 권태는 공허하다.’


 


꽃의 천길 깊은 속을 열고 귀 기울여 보았으나


텅 텅 비었네.


 


덩달아 내가 쓸쓸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차츰 비어가네.


나는 무기력하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네.


난 한 점의 먼지가 부럽네. 나는 차라리 쓰레기가 부럽네


 


 


 




 



무한을 갈구하는 나의 갈증을 그 누가 풀어주리오.


아아! 허무에 전율하고 절대 고독에 몸부림치는구나.


한계 상황의 절벽 앞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가혹한 인간의 숙명 앞에 엎드려


마침내 도피하는 정신 병자의 유일한 길인가!


 


에 취하고 탐하며 오로지 그 세계에만 몰입하는 唯美主義者!


자신만의 가상, 주관적 세계에 몰입하는 낭만의 허무주의자여!


 


 


 


 



 

 

나는 꽃 한송이에 드리워진 금기의 베일을 걷고 훔쳐본다.

마치 쉴러의 베일에 가리워진 사이스상을 훔쳐보는 진리에 목마른 청년처럼.

 

신비로 포장되던 홀리는 듯한 色香, 유혹하는 듯한 암수술의 로맨스도

! ! 이 허무를 어지할 것인가?

천 길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끝내 혼절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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