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의 운행 질서는 참되다.
처서가 지나고 조석으로 불어오는 肅殺之氣 숙살지기에
그 성하던 풀이 기운을 잃고 아늑한 휴식에 들어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삼천리 골골샅샅에 몰리는 崇祖孝親숭조효친의 행열은
한민족의 대이동을 연출하는 장엄한 현대판 기적이다.
예초기 그 맹렬한 哭곡이 지축을 흔들며
이 날만을 학수고대하던 조상의 귀를 번쩍 깨운다.
"할아버지 우리가 왔어요. 이번에는 아들도......”
몇 조각 남지 않은 骨身골신의 쇠잔한 기력을
혼신의 힘을 모아 正坐정좌하신다.
頭骨두골이 천정에 닿아 봉분이 팽팽하다.
“오오! 네가 왔느냐.”
예초기 날이 부지런히 돌아가며 저 무례하고 삿된 잡초를 討伐토벌한다.
이윽고 말갛게 면도한 초옥 지붕 위에 햇볕을 갈무리하여 고르게 편다.
올 겨울 북풍한설에는 부디 턱을 떨지 마소서.
내년 봄 봉긋 솟은 초옥에 할미꽃 예삐 피어오르소서.
진한 풀내음은 땀으로 범벅된 적삼에 배인 고인의 체취
고달픈 세상살이 한숨을 토할 겨를도 없었던 忍從의 나날들
무릎을 꺾으며 조아리며 이마에 흙 한 줌을 묻히며
내가 가야하고, 되어야 할 흙의 포근한 향기를 맡는다.
당신으로 인해 제 생명을 얻었나이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아들의 아들이 살아있을 무궁한 세월까지
우리는
한 울 안에
살아있습니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한 울 안에 ......
벌 초
(중략)
억새에서 풀물이 뚝뚝 배어난다.
할아버지 바지게에서 배어나온 풀물이 삼베 적삼을 물들이고
목덜미에 생채기를 냈을 풀이파리에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당신의 체취
가시덤불에서 양식을 캐고 돌더미 밭에서 고단한 하루를 살던
확 달아오른 당신의 입김 당신의 땀내음
노오란 낙엽송 이파리를 깔고 누우신 할아버지
예초기 강열한 소음이 햇볕을 고르게 펴고
오한으로 얼은 뼈 마디마디에 온기를 지핀다.
(중략)
나도 가고 내 아들도 가면 이 길 묻히고
당신은 볼록한 등마저 내리고 그 흔적마저 지우고
풀 한 포기로 돌아가세요.
저희가 오지 않아도
작은 벌레 한 마리
풀이파리에서 아침 이슬 길어가
당신의 흰 늑골 사윈 자리에 살림 차리게
고운 흙으로 돌아가세요.
(졸시 벌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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