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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블랙커피 일곱 잔의 추억

                                          “어머! 이 아저씨가 여기 있네.”


기원에 배달 온 다방 아가씨가 흠칫 놀라며 소리친다.


 


몇 판 째 바둑판에 머리를 쳐 박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흘낏 바라보자


 


아저씨. 아까 우리 다방에 왔던 분 맞지요?”


! 예 그런데요.”


 


 



 


 


너덜너덜해진 기억의 주머니 안에 남은 추억 몇 가닥을 반추한다.


추억의 휘장에 드리우면 아프고 힘들었던 일도 아름답다고 했질 않던가?


 


그러니까 결혼하기 잠시 전이니 35년이 넘은 일이다.


고교 교사로 발령 받고 4개월 남짓 되던 겨울,


누군가의 소개로 한 아가씨와 맞선을 본 일이 있었다.



 

스물 일곱 살의 청년은 군복무를 마친 직후라 구속에서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며

새내기 교사의 순수한 열정과 젊음의 패기로 넘쳤었다.

 

맞선을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리라.

때가 무르익어 제 짝을 찾으려 나선 나는 보물섬을 찾아가는 동화 속의 소년처럼

청년의 포부와 인간적인 면모와 매력을 잘 드러내려했다.


 

 

 

 

첫 만남에서 무슨 차를 마셨는지 기억은 없지만

찻잔의 따뜻한 기운과 향기를 음미하면서 품위 있게 마시려 노력했다.

눈빛에도 진실이 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동공을 부드럽게 응시했을 것이다.

 

맞선은 탐색이라고 믿는 것은 영악한 생각이며 아름다운 낭만의 유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첫 만남의 말미에는 으례 다음 약속을 정하는 법이다.


 

내일 00시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이런 약속은 상대의 의사를 타진하는, 可否가부라는 두 면의 주사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운명이자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그 날 밤은 잠을 못 이루었다.

이런 막중한 인생 사업을 앞두고 더구나 양자 택일의 결단을 앞둔 시점에서

잠에 빠지는 배짱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한 눈에 확 끌리는 것은 아니어도 은근하게 호감이 갔다.

썩 예쁘거나 상냥하지는 않아도 자신감 있는 태도, 서글서글한 눈매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아가씨였다.

 

그런데 스쳐가는 일말의 불길한 예감들이 호감과 교차하는 것이었다..

혹시 내가 별로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부자도 아니고, 나는 키도 작잖아.

베개를 고쳐 베며 뒤척여도 잠은 올 리가 없었으리라.

 


 

 

            

 

 

 

여러 생각이 뒤엉켜 잠 못 이루어도 D-day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약속한 다방 어제 그 자리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아가씨는 나타나질 않았다.

 

다방 아가씨가 차 주문을 받으러 여러 번 왔지만 동행이 있다며 뒤로 미루기를 두어 차례,

입구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초조함에서 초라함으로 변해갔다.


 

! 역시....그렇구나.....어쩐지 시선이 따뜻하지가 않았어.

아마 그 쪽 부모가 반대했는지 몰라. 불길한 예감이 갈수록 기세를 더해가고,

1시간이 더 지났을 시간에 기다림은 한계에 이르렀다.

선택받지 못한 이의 서글픔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패배자는 고배를 들어야 해.

쓴 잔을 들며 이 수치스런 순간을 잊으리라.


 

 

아가씨!

큰 소리로 호출하는 내 음성은 매너있는 신사의 음성이 아니라 실망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쪼르르 달려온 다방 아가씨가 누구인가? 눈치가 백단이다.

이 정황을 척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으리라.

 


 

 

       

 

 

여기 블랙 커피 일곱 잔을 주시오. 미안하지만 사발 한 그릇에 담아 주시오.”

?”


아무리 천태만상을 두루 겪어도 이런 뜬금없는 주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며 의아해 하였다.


 

블랙 커피 일곱 잔. 사발에

톤은 높아지고 단호한 내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곧 가져온 사발에 담긴 시커먼 색깔의 커피를 덥썩 집어들고 사약을 받듯 단숨에 마셨다.

목구멍에서 벌컥 벌컥 넘어가는 소리에 어제의 품위는 온데 간데 없었다.

곧장 다방을 나온 후 인근에 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며 서글픈 처지를 잊으려 했던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나간 후에 한 아가씨가 와서 오래 기다리다 갔는데.....”


 


 

 아뿔싸! 누군가의 실수로 두 시간의 오차가 있었던 것이다.

운명의 여신의 장난인지, 인연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인지,

실수도 인연의 일부인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도 인연의 끈은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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