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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즐거움

호박 구덩이를 파면서

들뢰즈의 아장스망을 둘러보다가 순간적인 욕구가 발동하여 곧장 삽을 들고 호박 구덩이를 판다
욕구는 새로운 생성을 위한 출발점으로 생산적인 변화의 시작이다
불쑥 치밀어오르는 욕구라고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충동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긍정적인 힘인 것이다
내가 거주하고 노동하고 산책을 하는 택지를 포함한 600평 정도의 땅은 내 자유로운 욕구를 발휘하는 터전이다
가장 원초적인 생산을 경험하고 맛보는 삶의 실습장이요, 누림터다
매년 밭에는 몇가지 농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사용하지 않던 땅을 겅작지로 이용하기도 하고 심는 작물의 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자배하는 방법도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동일성과 차이가 반복된다

호박 심을 구덩이를 두 군데에 파고 퇴비를 반 포대씩 넣는다
늘 심던 자리가 아닌 곳인데 넝쿨이 뻗어나갈 자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적합한 곳을 정한 것이다

호박을 심으면 뻗어나가는 일정한 공간이 생기며 경작의 지도가 바뀐다
그 지도를 따라 내 관심과 발자국과 손놀림이 동반하며 미세한 삶의 차이가 생겨난다
호박을 심어놓고 싹이 트는 것을 확인하려 구덩이를 찾아가는 내 발길은 생성과 변화의 과정이다
돌무더기가 있는 곳으로 유인할 수도 있고 수로 위에 쌓은 나뭇가지들 위로도 유인할 수 있어 호박순들이 그 길을 오르는 모습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띄고 즐거워할 수 있다
이 작은 즐거움은 <호박 한 개에 돈 얼마>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적 관점과 매우 다른 것이다
어미줄기와 아들줄기를 알고 적심을 해 주고 달린 작은 호박이 매일매일 자라는 과정을 살피고 오늘 딸까 내일 딸까를 망설이는 행복한 고민도 하고 연한 호박잎을 쩌서 쌈으로 먹기도 하고 늙은 호박의 당당한 모습이며 야물게 익은 것을 거두는 기쁨은 마트에서 구입한 호박으로는 향유할 수 없는 생명 과정의 신비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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