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곡의 글방

기림의 고수들의 결투를 보며

기림의 고수들이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지고 나는 현장 아닌 현장에서 생생한 구경을 한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방송은 현장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장 시킨다
방송통신 미디어와 기술의 발달로 <지금 여기>라는 현장의 범위가 한 나라를 넘어 세계로 까지 확대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이 대국을 보기 위해 내 일과를 조금 수정하고 족히 너댓 시간을 몰입하는 일이 재미있고 흥분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바둑 한 판이 수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세간의 화제가 되는 일의 근원을 바라보는 놀랍고 착잡한 생각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충족 시키는 일이지만 바둑 한 판의 승부가 내 생계나 삶의 본질과 거리가 먼 사소한 면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하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만족스럽고 가치있는 일이다
바둑은 단순한 오락이나 게임의 수준을 넘는 고도의 정신작용을 동반하는 과정이 승부의 결정적 인과관계가 된다
이 방면에서 세계적 천재들이 한 수 한 수를 번갈아 둠으로써 반상에 전개되는 변화의 흐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스릴 만점이다
그런데 바둑의 신이나 다름 없는 AI가 개발되어 매 수마다 천재들의 착점을 냉정하게 평가를 한다

바둑의 인공지능이 획기적 발전을 하게 된 것은 채 십년이 안된 알파고의 등장 이후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인공지능 바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5년 전에만 해도 아마츄어 바둑 실력에 불과했었다고 한다
이제 최상위의 인공지능의 실력이 세계 최정상 기사를 석 점 놓고 둘 정도라니 아연실색할 정도다

인간이 가장 우월하다는 종래의 생각은 이제 바둑계에서는 무지에 따른 교만에 불과할 뿐이다 이세돌이 잠깐이나마 인간의 자존심을 부추겼을 뿐 이제는 프로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인공지능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인공지능도 엄밀하게 보면 바둑의 신은 아니며 인공지능이 최고조에 도달한 가상적인 상태가 바둑의 신의 상태와 가장 근접할 것이다

바둑은 순간순간 착점을 결정해야 하는 결단을 요한다  한정된 시간을 소모하며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갈등과 고뇌를 겪는다 오로지 자신의 판단으로써 그 결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는 전장의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
작은 실리에도 극도로 민감하다가도 더 큰 대세와 승리를 위해 실리를 내주는 기만 전술을 펴기도 한다
고도의 심리전이 동원되기도 한다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기도 한다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두뇌에 가상의 판들이 수없이 그려지고 지워진다
그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학습하고 훈련하고 실전을 통해 강자로 성장한다

바둑은 양자 간의 승패라는 단순한 구조에 있다는 점에서 등위를 매기는 스포츠와 다르다  둘 중의 하나만이 승리하여 살아남고 그 상대는 패배하며 죽고마는 냉엄한 구조적 운명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둑 기사는 매 판마다 승패의 운명의 기로에서 승리의 환희와 쓰라린 패배의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진다
이것이 승부사의 가혹한 운명인 것이다 승리의 이면에 도사린 패배의 쓰라림이 승리의 우쭐함에 경종을 울린다 뇌기능이 저하되는 노기사의 예전 같지 않은 실력으로 밀리고 마는 냉철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바둑을 배워둔 것이 취미생활의 폭을 넓히고 삶의 재미를 누리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제는 직접 대국을 하기보다는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 전문 기사들의 해설을 들으며 내 예측과 판단을 곁들이며 몰입하다 보면 어느 새 나도 어느 한 편이 되고 마침내 승패의 구조에 빠지고 만다
바둑을 보며 눈 앞의 승부만이 아니라 그 바탕에 깔린 인문적 사유를 곁들이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옳지, 잘 하는구나!
오늘은 내 응원을 받는 두 기사가 나란히 승리하여 기쁘고 즐겁다


'청곡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산서원에서  (1) 2023.12.21
강설한담降雪閑談  (0) 2023.12.16
통영의 밤길 산책  (1) 2023.12.15
전보여 바이바이  (1) 2023.11.16
슈퍼블루문  (0) 202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