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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벌초

 

 

벌 초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러 가자는 기별을 받고


나는 비로소 진양 정가 은열공파 후손이 된다.


잔주름이 갈수록 늘어나는 족보 한 켠에


열병하는 군인처럼 부대별로 줄을 서 있던


아직은 이승에 있는 내 이름 두자에


부역 통지가 징집 명령처럼 당당하다.


 


 


도로변에 목을 늘인 채 수척해진 만월당을 지나


주인 바뀐 용수막 옛집에 마른 목을 추기며 산소 가는 길


강선대 모암정 내려다 보이는 문중산 둔덕에 닿자


잡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날을 세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풀의 성성한 비위를 상하지 않게 몸을 낮추고


상석은 켜녕 반반한 길마저 없는 송구함에 고개 숙인다.


억새에서 풀물이 뚝뚝 배어난다.


할아버지 바지게에서 배어나온 풀물이 삼베 적삼을 물들이고


목덜미에 생채기를 냈을 풀이파리에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당신의 체취


가시덤불에서 양식을 캐고 돌더미 밭에서 고단한 하루를 살던


확 달아오른 당신의 입김 당신의 땀내음


 


 


노오란 낙엽송 이파리를 깔고 누우신 할아버지


예초기 강열한 소음이 햇볕을 고르게 펴고


오한으로 얼은 뼈 마디마디에 따뜻한 온기를 지핀다.


산돼지가 헤집은 당신의 정수리에 다이아찡 같은 뗏장을 얹고


꼭꼭 밟아 다지지만 작년보다 작아지는 할아버지의 키


 


 


나도 가고 내 아들도 가면 이 길 묻히고


당신은 볼록한 등마저 내리고 그 흔적마저 지우고


풀 한 포기로 돌아가세요.


저희가 오지 않아도


작은 벌레 한 마리


풀이파리에서 아침 이슬 길어가


당신의 흰 늑골 사윈 자리에 살림 차리게


고운 흙으로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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