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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담화

에피큐로스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누다.

 

 

오늘 하루가 텅 비어있다.

 

하루가 텅 비어 있다고 禪的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무대라는 것이다.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도 통제받지 않는 時空시공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이기도 하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 되는 것처럼 살아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주말에 다녀가던 서한당도 오지 않고 風磬풍경이 고적한 뜰을 걷는다.

쉽게 약속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약속을 어기는 법이 적다.

오늘도 볕이 무한정 쏟아질 것이고 시간이 느릿느릿 갈 것이다.

비어 있으므로 걸릴 것 하나 없이 욕망이 물처럼 흐른다.

 

 

드나드는 길 위의 새하얀 눈을 옆으로 밀어낸다.

우체부와 고양이가 좋아할 일이다.

아침 식사로 고구마 한 개와 사과 한 개. 간식으로 땅콩도 한 줌 있다.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은 갖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쾌락주의를 공부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며칠 째 에피큐로스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눈다>고 표현한다.

지혜로운 철인을 내 개인의 삶으로 끌어들여 듣고 묻고 반박한다.

 

2천 년 전에 형성된 화석처럼 뻣뻣하던 그의 사상이 말랑말랑해지며

내 삶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온다.

 

 

나는 고대의 쾌락주의를 학문으로, 철학 사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교단에 설 일도, 책을 펴낼 일도 없다.

머리가 둔해지고 혀가 어눌해진지 오래다.

그래도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 하나 있어 다행인걸.

인문학에 대한 애정, 주체성, 자존심 같은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샘솟듯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리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자유인이다.

 

 

볕을 쬐며 나무에 돋을새김을 한다.

칼질, 망치질은 자유인의 맥박이요 호흡이다.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

선이 따로 없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 선이다.는 그의 말을 상기한다.

 

그러나 어떤 욕망은 고통과 불편을 주기도 한다.

술을 멀리하고 담배를 끊은 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쾌락의 향유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이념, 가치, 신념의 기준에 따라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 아닌

자발적으로 생산한 내적 동기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자유인이다.

 

바람직하다고 내가 스스로 판단하는 욕망에 나를 맡겨두자.

그것이 내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하리.

비록 개인적인 사소하고 하찮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우리'나 '집단'은 내 생각, 내 존재를 무시하고 제한한다.

 

 

 

 

내가 산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50대 중반부터 시작한 제2의 인생은

그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나름대로의 선택이었다.

 

한적한 시골, 외진 마을에 자리를 잡고 사는 삶은

가치있는 삶에 대해 질문하며 도전하고 실험하는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블로그를 하거나, 나무를 다듬거나, 책을 읽거나, 텃밭을 가꾸는

구체적 일상들은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드러내는 축복, 감사, 환희의 노래요, 춤이요, 위로요, 한숨이요, 웃음이다.

 

 

구체적인 내 일상에서 쾌락주의자들의 사상이 체로 걸러지며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결코 에피큐로스를 지엄한 스승으로 삼고 쾌락주의를 신봉하려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