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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검정 고무신

 

재래 시장에 고무신을 사러갔다

한 개는 삼천원인데 두 개는 오천원이라는 유머에 한참을 고민하는 척 하다가 두 개를 달라고 하며 아저씨의 유머에 순간적 재치로 화답한다

재래시장이 이래서 좋다

 

샀다고 하지 않고 돈을 주고 샀다는 표현을 일부러 하는 까닭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상식에서 벗어나려는 것인데 시장경제에 대한 조소랄까? 돈에 대한 반감이랄까?

 

고무신은 예전과 달리 수요가 별로 없다 검약의 상징으로 산사의 댓돌에 놓이거나 옛 향수를 달래려는 농가의 노년층 일부에서 애용하는 정도일 것이다

태화고무의 말표신발이란 상품명이 반세기를 건너오니 미소로 반긴다

 

요즘 싸고도 질 좋은 온갖 신발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고무신이 더러 팔리는 것만으로도 매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무엇보다도 벗고 신기가 편하다는 점이 첫째가 아닐까?

잠깐 집 밖의 일을 볼 때 신발 주걱이나 손가락으로 신발에 발을 끼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들어주니 말이다

그리고 물에 젖어도 아무 문제 없는 것이 둘째가 아닐까?

그리고 세척하기도 쉬운 것이 셋째가 아닐까?

그런데도 오천원이라니 놀랍다

 

요즘은 값싼 것이 천대받는다

고급화를 선호하는 소비 풍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명품 선호 현상인데 일반인들이 감히 구입하기 어려운 유명한 명품을 보유함으로써 차별화를 통해 신분 상승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다

그런 속된 세태와 야속한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고무신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 밭에서 물을 주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는 통에 신발까지 젖었는데 고무신이라 별 문제가 없다

옥외 개수대에서 발을 씻기도 편하고 젖은 신을 세워두면 물이 금방 빠지니 문제가 없다

 

고무신을 사기 잘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도랑에서 발까지 깨끗이 씻고 들어가던 사촌 형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댓돌은 없어도 풍경 아래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놓아 달빛이 고이도록 하고 싶다

고무신이 내 삶을 질박하고 단순하게 이끄는 매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오천원짜리라고 하찮은 것이 아니라, 쓸모가 있어 당당한 신발인 것이다

 

고무신을 사기 잘했다

 

흰고무신에 때가 묻으면 비누칠 한 짚수세미로 몇 번을 두르기만 하도 세수한 얼굴처럼 깔끔해지던 기억을 떠올린다

시골의 5일장에서 찢어진 고무신을 때우던 오래 전의 추억도 덩달아 떠오른다

이 검정 고무신은 그런 수고마저 사양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양복의 구두가 아니라 핫바지 저고리나 작업복 어디에도 어울리는신발이다

매너와 격식 따위를 넘어선 실리와 간편을 중시하는 민중의 신이요 수도자의 절제의 상징이다

 

고무신을 사기 잘했다

 

고무신은 짓눌려도 금방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높고 단단한 굽이나 까탈스런 외형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탈하다

특정한 개인의 발에만 맞는 전유물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일도 가리지 않는다

여럿 모인 곳에 벗어 놓으면 누구라도 제 신발 신기 전에 이 푸근한 신에 먼저 발을 딛으니 고무신의 넉넉한 여유다

그래서 신발장에 올려놓지 않아도 짬짬이 공용이 되기도 하는 마음씨 푸근한 신발이다

 

검정 고무신을 사기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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