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곡의 글방

상추탑 비 오는 날 비닐돔 안에서 늙은 상추를 만난다 상추는 늘 그렇게 거기에 있었는데 오늘처럼 늙은 상추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저 스쳐갔을 뿐이었다 내 상추쌈 먹거리로 줄기에서 풍성하고 연한 잎들을 죄다 주고 상추가 변신을 한다 상추탑 기단 부위는 공양의 흔적만 남긴 채 비우고 탑신을 수직상승시켜 영락없는 다보탑이 다 깨알보다 작은 씨앗이 연약한 잎을 내고 자라며 내 먹거리로 온 몸을 내어주던 상추가....... 그 탑 상륜부가 노란 꽃으로 피어나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영생의 탑 앞에서 무심코 합장을 한다 더보기
목 없는 석불 경주국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목없는 돌부처가 많이 있다 예전에 중죄인에게 참수형이 있었는데 목 없는 석불이 참수를 당한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목이 떨어진 구체적인 사실 여부나 동기 등을 재론하고 싶은 의향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죄없는 돌부처도 참수를 당했구나 불심을 배격하는 폭도들의 도끼를 맞고 죄없는 중생들을 대신해 참수 당한 부처의 고난의 길이었구나 석불에게도 제 사주팔자가 있는 것인지 흥망성쇠의 운명에 좌우되는구나 박물관 관람객들은 혀를 끌끌 차며 애석해하거나 성물이 훼손당한 모습에 일말의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도 딱해서 석불 목에 내 목을 얹고 탄식을 한다 "에구구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고 더구나 거룩한 성상이 되었다고 가혹한 메질.. 더보기
우회로 우회로 곧바로 가지 않고 빙 둘러서 돌아가는 길 돌아서 가는 길이 더 빠를 수 있고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인간적일 수 있고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도 그렇다 더보기
고택의 나무 절구통 어느 고가의 처마 아래 나무 절구통 하나 한 아름이 넉넉했을 인근 야산의 소나무가 대갓집 세간살이로 들어와 그 많던 식구들 음식 바라지하느라 애를 많이도 썼겠다 공이로 절구바닥을 쿵쿵 내리치며 땀을 훔치는데 담장 너머로 그 신명이 흥겹더니 어느 적부터인지 일감도 줄고 모퉁이로 밀려나 하품만 하며 추억에 잠기는구나 나무좀벌레들이 구멍을 뚫고 공이 안에 제 집을 짓고 있는데 옛 주인 아호가 일두(一蠹)라 하여 크윽크윽 한 바탕 웃음을 짓고 명실이 부합하지 못하다 탓하지 마라 한 시절 그 많던 식구들 바라지 하느라 닳아빠진 공이와 짓눌린 바닥의 시퍼런 멍을 훈장으로 여기는 백살도 휠씬 넘은 노인장이 아니냐 말이여 더보기
장마라는데 장마철에 접어들고 어젯 밤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는다 비닐 돔에서 빗방울이 낙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한가로이 앉아 있다 당분간은 물의 기운이 강성하고 불의 기운이 퇴조하게 될 것이다 태양을 가린 구름들이 무더기로 세력을 만들어 태양에 저항을 한다 밝고 뜨겁고 맹렬한 기운과 어둡고 차고 온유한 기세들이 대치하다가 한 쪽으로 기운다 하늘은 구름의 장막으로 태양을 가리고 빛은 위세에 눌려 힘을 잃고 어두워진다무한정으로 쏟아지는 생명수에 대지의 온갖 식물들은 제 세상인양 활개를 뻗으며 성장할 것이다 천지에 물이 내리고 흐르며 물의 나라가 펼쳐진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목마른 뿌리들에게 생명수가 되니 만물의 어미다 게다가 하늘로 흐르기 위해 존재를 변신하여 상승하여 구름이 되고 다시 물로 화하니 신묘한 큰.. 더보기
타이타닉호 타이타닉호의 슬픔과 비명이 가라앉은 4천미터 심해 선택 받은 극소수들만이 누릴 수 있는 초호화 유람선 그 비극적 종말을 영화로 미화하며 한바탕 잇속을 챙기던 희한한 시장 원귀들의 처절한 비명이 수장된 해역마저도 시장이 되고 한 몫을 챙기는 이 시장의 상인들 우리의 단골 고객은 언제 어디건 있을 거라며 회심의 미소를 거두지 않던 마켓팅의 고수들 극지 탐험으로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거부들의 욕망은 무제한이다 '아무나 갈 수 없기에 우리는갈 수 있어' 도도함과 기상천외함으로 무장한 슈퍼리치들의 신앙심 이 깊은 해역에 놓인 덫 자본주의의 함정에 또 대물이 제발로 걸려든다 더보기
민주주의의 아킬레스근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리며 평등하다는 이념을 가진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역사를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고 피땀으로 쟁취한 인류의 이념과 경험과 지혜와 투쟁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완벽한 최상의 제도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 길은 시대적 상황과 현실상황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인류의 최고 제도라고 하더라도 삼손의 아킬레스근처럼 약점이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중우정치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권리 의식에 부합하는 책임의식이 부족하다 굿만 보고 떡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복잡다단한 정치 현실과 전문 분야에 대한 대한 무지와 소외감 등이 정치 전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 .. 더보기
선친의 제사를 모시며 선친의 제사를 모시는 날이다 세상을 뜨신지 37년이 지나고 태어나신지 100주년이 된다 현재의 내 나이보다 7년이나 이르게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다 십년만에 장남인 나를 낳았으니 어머니의 마음 고생과 아버지의 간절함을 알만하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기에 당신의 교육적 이상을 나에게 투사하여 극진히, 엄격하게 대했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정직하고 강인하고 명예로운 사람이 되도록 강조하셨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범대학에 가라고 하셨다 예절 바르고 정의롭게,합리적으로 살라며 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엄한 훈육가였고 철저한 삶의 멘토였고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를 지셨다 하도 엄하여 집에서 쫒겨나온 적도 많았다 술을 많이 드시고 나무랄 때는 짜증을 많이 냈고 술주정이 심할 때는 온 가족들이 힘들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