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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의 글방

무늬비비추 무늬비비추꽃이 한창이다 친구의 집에서 몇 포기 캐다 심었는데 꽃이 피기 전에도 무늬잎이 예뻐 눈길을 끌었는데 쭈욱 꽃대를 올려 층층이 꽃을 매달고 피어난다 바람에 흔들리며 당당하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꽃이 깃발을 달고 선언한다 여기는 나의 영토 유일무이한 존재의 소도 내 주권이 미치는 신성한 땅 바라보는 사람 하나 희열에 벅차 맞장구를 친다 아름다워라! 존재의 공연장 신의 손길로 빚어내고 입김으로 피운 작품 더보기
이국의 모자 모자는 신분이나 역할의 상징이다 갓을 쓴 제관, 모자를 삐딱하게 쓴 예비군인, 베레모를 쓴 특수부대 군인, 검정 교복에 교모를 쓴 까까머리 중고생, 힙합 모자를 쓴 젊은이, 중절 모자를 쓴 신사........이루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모자는 생활에 밀착된 필수품이고 패션이고 상징이다 칠 팔년 전 베트남 여행 중에 1달러짜리 모자를 지금도 애용하고 있다 턱에 거는 끈이 닳아서 떨어졌지만 고무줄로 보수하여 앞으로 몇 해는 충분히 사용할 것 같다 세상에 이리도 멋지고 값싸고 편리하고 사랑스런 모자가 있다니........ 사람들은 '가성비가 좋다'는 표현을 제품 사용 후기에 많이 사용한다 시장에서 가격 대비 성능의 효율성을 일컫는 용어인데 그런 점에서도 탁월하지만 나는 민예품으로서의 가치를 주목한다 천원짜리 일회.. 더보기
깃발 사람들이 모여 깃발을 달고 흔든다 저 이념의 푯대는 결집의 마술봉 너와 내가 연결된 하나라며 일깨우고 선동하는 무언의 아우성 단순하지만 명료한 메시지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숙이고 뭇사람들을 감싸서 묶을 수 있는 가공할만한 보자기로 그리고 말없는 몸짓으로 외치는 지상 최고의 선동가 더보기
초롱꽃이 피어나고 초롱꽃이 초롱을 들고 뜰 곳곳에서 꽃을 피우며 불을 밝힌다 한 가지에 여러 등을 달고 무거워 등줄기를 낮추고 바람에 흔들린다 촛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고 바람막이처럼 가린 특이한 형태와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초롱의 안쪽을 살펴보려 뒤집어 보기도 한다 암수술이 마치 초 두어 개를 모아 천정에 매달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궁륭의 건축술을 선보이는 것일까? 마치 높은 하늘처럼 가운데를 높여 상하로 길쭉한 아치로 사방을 가리고 있다 궁륭의 벽에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무늬가 물들어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저렇게 사방에 휘장을 쳐두고 소망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초롱을 들고 삽작 밖까지 나가서 어두운 길을 밝히며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 따스함인가? 전기는 엄청난 밝음으로 편리를 제공하지만 바람에 흔.. 더보기
꽃의 미로 당귀꽃의 유혹에 빠져 무리에 깊숙히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아뿔싸!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다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지금도 출구는 찾지 못하고........ 더보기
동문회 몇 시간 전 오늘은 북상초등학교 총동문회가 있는 날이다 경향 각지에 있는 동문들이 이 날을 기다려 고향을 찾아온다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는 이들의 의식 저변에는 귀향에 대한 동경이다 고향으로 귀의한다는 것은 실거주지를 옮긴다는 좁은 의미만이 아니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넓은 의미도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피투된 존재로서의 내가 이곳에서 이 친구들과의 만남은 놀라운 인연이 작용하고 있다 학교 옆의 숲은 소나무와 굴밤나무 고목이 울창하고 그 우듬지에 황새라고 믿었던 왜가리들이 상주하고 당시에는 두 개의 정각들이 있는 삼각주는 우리들의 정서를 기르는 최고의 자연의 학교였다 농촌이라 당시에는 군내에서 비교적 소규모 학교라 북상.. 더보기
신령한 천왕봉 지리산을 오른다 백무동 골짝에서 신발끈을 졸라매며 각오를 다진다 골이 깊어 높아진 것인지 봉우리가 높아서 골이 깊어진 것인지 돌고 돌아도 오르막길은 몸을 눕히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쉬며 차오르는 숨을 가라앉히고 싶어도 신령한 이끌림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뭇 봉우리들이 쟁취하려는 왕관을 쓴 천왕봉은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갈비뼈 같은 골짜기를 따라 계류를 흘러내리며 사람들의 길을 내준다 하늘과 땅이 사람을 사랑하여 높고 넓게 펼쳐 사람들을 품는다 사람들은 무한한 공경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에 감사하며 천지인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을 꿈꾼다 천왕봉은 산의 신령함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견디며 풀리는 다리의 온 힘줄로 오로지 마음에는 신령과 접화하려.. 더보기
제석봉 고사목 제석봉에 나무들이 꿋꿋이 서 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잿빛 얼굴, 하얀 뼈대를 드러내고 푸른 잎과 잔 가지는 죄다 떨구고도 척추를 곧추세우고 요지부동이다 누가 이들을 고사목이라 하는가? 천왕봉을 오르려 최후의 걸음까지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투사를....... 더보기